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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Jan 08. 2023

너, 맞지도 않는 옷을 입느라 고생이 많구나.

 종종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나간 날의 불편함을 떠올린다. 작은 옷을 입은 날엔 툭하면 주위를 살피고 바지 버튼을 푸르기 마련이고, 말려 올라가는 어깨를 끌어내리기 바쁘다. 큰 옷을 입은 날엔 그것대로 헐렁해서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계속해서 끌어올리느라 바쁘다. 이런 날엔 다 팽개치고 한 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다. 아마 우리 엄마가 이 꼴을 봤다면 “몸에 맞지도 않는 옷 입는다고 고생이 많다, 야.”하고 혀를 끌끌 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엄마, 나는 사실 평생 이렇게 안 맞는 옷을 입은 기분으로 살아. 공책 위에 문장을 적고 두줄로 그어버렸다. 엄마라는 글자 위에 ‘아랑’ 하고 알 수 없는 단어를 덮어써버렸다. 엄마에게 몇 번이나 일기장을 들켜 본 자식의 습관 같은 것이다. 다 커서도 이 버릇을 못 버린 스스로가 웃겨 펜을 던져 놓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래, 그런데 정말 그런 기분으로 살고 있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어쩌면 나는 평생을 상냥한 척하며 살았다. 웃기지도 않은데 웃었고, 슬픔을 공부하다시피 하면서도 남들 앞에서 울지 않았다. 요즘 애들 말로 워낙 T성향이 강한 성격이라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감을 잘 못하고 훈수질이나 둔다고 핀잔을 들었다. 그때는 그런 핀잔을 듣고서도 뭐가 그렇게 잘못됐다는 건지 몰랐다. 지금 중요한 건 너희 성적이 떨어진 게 아니고, 내가 제대로 된 대학을 못 갈지도 모른다는 건데?


 대학에 가서 아르바이트라는 걸 하면서 내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걸 배웠다. 사장님과 함께 일하며 자본주의 미소를 입가에 달고 살았다. 지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밤에는 그런 내가 역겹기도 했다.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차라리 사람을 만나지 않는 직업을 선택해야 했다는 걸. 그런데도 나는 계속할 게 없어서 서비스직을 전전했다. 뒤틀린 운명을 타고난 대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서비스직을 전전하다 정착한 지금의 일이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너무도 많이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직업은 내 앞에 헌신과 사명감, 희생과 봉사정신 같은 단어를 거리낌 없이 나열해 버리기도 한다. 맹세코 나는 이런 단어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나는 너무나 분명하게도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사이즈도, 색상도, 디자인도 맞지 않는 옷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는 기분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개 같다, 뭐 그런 말로는 충족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보던 웹툰 중에 '정글고'라고 부르던 것이 있었다. 극 중에서 여러 불만과 사회적 환경에 절망하고 있는 학생을 상담을 해주던 선생님이 학생에게 묻는다. "너는 옷을 샀는데 네 몸에 맞지 않으면, 그 옷을 네 몸에 맞추니 아니면 네 몸을 그 옷에 맞추니?" 이는 분명, 네가 불만을 갖고 있는 그 사회를 네 손으로 변화시키라는 메시지가 분명했다. 그런데요 선생님, 저는 이제 그런 느낌을 받아요. 이 옷은 이미 너무 작고 더없이 망가져 있어서 제게 맞출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다시 상담 좀 해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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