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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Jan 17. 2023

아무렇지 않은 척

 가난을 질투하는 사람들이 탐낼만한 서사가 내게는 있다. 엄마의 앞뒤로 서가며 빚쟁이들에게 함께 쫓기던 어린 시절,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또 좋아지기도 낡아지기도 했던 변화무쌍한 살림살이, 크고 나서부터 학업의 우위를 점했던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 종종 투잡, 가끔은 쓰리잡. 그러니까, 왜 누구는 갖고 싶어 하는 과거가 내게는 숨겨야만 하는 상처일까? 오늘도 할 일 없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시선을 멀리 날려버렸다. 이런 얘기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바깥은 새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유난히 눈이 희귀한 겨울이구나, 안타까울 새도 없이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도시 곳곳에 쌓여 며칠째 녹지 않고 있다. 이 겨울은, 특히 눈이 녹지도 않을 만큼 시린 겨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욱 잔인하기만 한 계절이다. 그들은 이마저도 부러울까? 이 견딜 수 없는 추위마저 갖고 싶을까? TV에서 웃기지도 않은 얘기로 떠들어가며 누가 더 복스럽게 먹는지 자랑을 하다가, 누가 더 적게 먹는가로 경쟁을 하기도 했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게 쉽게 연민하듯, TV 속 사람들 모습을 보고 쉽게 배가 고파졌다. 전이란 무서운 것이구나.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나 부엌 찬장을 뒤졌다. 시계는 벌써 9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엔 뭔가 차려 먹기엔 조금 부담스럽고, 배달을 시키기에도 애매하다. 결국 찬장에 가지런히 꽂힌 S라면과 J라면 그리고 매운 볶음면 사이에서 손가락을 놀리다가 J라면을 집어 들었다. S라면은 끓이는 용, J라면은 부셔 먹는 용.


 TV를 끄고 노트북을 열어 적당한 영화 한 편을 골라 틀었다. 영화의 오프닝이 진행되는 동안 라면을 적당히 부시고 뜯어 스프를 그 위에 살살살살 뿌렸다. 와드득, 와드득, 씹으면 씹을수록 그 단단한 결합이 해체되며 서서히 잘게 부서지는 느낌이 좋았다. 스프가 골고루 묻지 않아 어느 부분은 혀가 아릴 정도로 짜고 매웠으며 또 어느 부분은 맹숭맹숭했다. 그 모든 맛이 입 안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꽤 괜찮은 맛을 냈다. 추억이 가미돼서 보정되고 미화된 그런 맛을.


 열심히 입 안 운동을 지속하다 보니 편안함이 밀려왔다. 뱃속이 차고 나니 적당한 피로감이 느껴지며 곧 잠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화는 딱히 재밌지도 않았으므로 부서진 라면 잔해들을 한쪽으로 밀어 넣고 화장실로 향했다. 정갈하게 정리된 세면대 위에 꽂힌 하나의 칫솔과 치약을 집어 들어 짜는 순간,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써준 편지가 머릿속에 둥둥 떠올랐다. ‘이제 집에 있으면서 엄마가 해주시는 아침도 잘 챙겨 먹어. 라면 같은 거 부셔 먹지 말고.’


 난 아직 궁금하다. 그들은 매일 아침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교실 한 편에서 라면을 부셔 먹는 삶도 탐낼까? 도저히 적당히 먹을 게 없어서, 무얼 사 먹을 돈은 더욱 없어서, 그런데 누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건 죽어도 싫어서, 민망한 마음을 숨기고 되려 과장된 표정으로 맛있다고 나 자신까지도 속여가며 라면을 부셔 먹는 경험이 갖고 싶을까? 거울을 마주 보고 이를 닦는 내내 고민해 봤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내게 있어 가난은 그저 삶의 가장 추악한 얼굴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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