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by 이재리

여행을 하다 보면 힘든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의외였던 것은 그 힘든 순간이 여행을 시작한 첫날밤부터 찾아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숙소였다. 상 벤투 역 근처에 지어진 오래된 호스텔은 인테리어는 아름다웠을지 모르나 방한은 최악이었다. 오래된 창문의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걱거렸고, 층고가 높아 아무리 난방을 해도 따뜻해질 줄을 몰랐다. 낮의 햇볕은 따뜻했으나, 밤이 되자 매섭게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결국 가져간 패딩을 입고, 목도리까지 사서 두르고 손난로까지 켜고 잤음에도 불구하고 추웠다. 잠결에 '내가 왜 거금을 들여가며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을까?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강렬히 했다. 다음 날 아침 몸을 일으켰을 때 이미 머리는 띵했고, 온몸은 찌뿌둥했으며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이 숙소에서 1박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다음부턴 숙소 리뷰에 좀 더 신중을 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짐을 쌌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로비에 캐리어를 맡기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포르토를 마저 둘러본 후 오후 5시경에 호스텔로 돌아와 짐을 찾고, 바로 옆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어제와 달리 의외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 목도리를 마저 매고 나오지 않을 것을 후회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길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출근하는 포르토 주민들의 일상을 훔쳐보는 것은 짜릿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보면 그 마저도 부러운 삶이기 마련인 것을.


버스 안에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 이른 아침에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버스가 정류장마다 멈춰서며 승객을 태울 때마다 ‘과연 누군가 내 옆에 앉을까’ 곁눈질을 해가며 25분을 흘려 보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세랄베스 뮤지엄이었다. 여행을 가면 꼭 들리는 곳이 그 나라의 미술관과 카페다. 개인적으로 탐미정신이 투철한 탓에 예쁜 것을 보고, 예쁜 곳에 가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오래된 성당이나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광장을 가는 것보다 내 눈이 만족할 수 있는 곳에 머무는 게 좀 더 의미 있는 경험으로 남는다는 걸 깨달은 후 정하게 된 여행 방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단정하고 아름다운 장면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친절한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미술관과 정원을 모두 관람할 수 있는 통합권을 끊고 입장했다. 세랄베스 미술관은 기본적으로 깔끔했다. 하얀 벽과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나무 바닥이 정갈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전시장에는 여느 현대미술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주제들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기후 위기, 환경 보전, 양성 평등, 역사 등. 그런 주제들 속에서 가슴속 깊이 진하게도 남은 것은 단 한 문장이었다.


“Women are still considered second class. Even after all the victories and the comforts of contemporary life.” - Paula Rego, 2016.

("여성들은 여전히 제2의 계급으로 간주된다. 그 모든 승리와 현대 생활의 안락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파울라 레고, 2016)

미술관은 3층으로 꽤 커다란 규모를 자랑했다. 1,2,3층이 각각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를 헤매느라 어느덧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비행기에서 24시간 가까이 고된 하루를 보내고 어젯밤마저 추위와의 사투를 벌였으니 체력이 바닥난 탓이려나 싶었다. 곧 있으면 조식으로 채운 배도 꺼질 텐데, 그러면 더 견디기 힘을 터였다.


서둘러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향긋한 풀 냄새에 말 그대로 온몸이 전율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정원에는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많지 않아 고요했다. 나 홀로 온전히 존재하고 내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정원 곳곳에 야외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서 이를 따라 걷다가 커다란 분수대 공원 앞에 앉아 쉬기도 했다. 좀 더 내려가 보니 양인지 염소인지 모를 동물들을 방목하고 있는 목장이 나왔다. 말도 안 되지 이런 풍경.

양인지 염소인지 구분하러 가기엔 다리가 몹시 아팠다.

그 앞의 벤치에 앉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여행에 대한 즐거움보다는 몸의 피로가 더 크게 몰려왔다. 돌아가 쉴 수 있는 숙소가 있는 것도 아니라 내 몸을 잘 달래 가며 움직여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미술관도 정원도 너무 넓었다. 이제 그만 돌아보고 뭐라도 먹으러 가야지, 생각하며 앉아 있다 보니 옆에 앉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중년의 부부였는데 한 사람은 조용히 책을 보고 있고, 또 한 사람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도 잠시 앉아 쉬면서 노래나 들어야겠다 싶어 이어폰을 꺼내 들었다. 매번 장기 여행을 나오기 앞서 그 여행 때마다 들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서 오는데 이번엔 그럴듯한 노래를 담지 못했다. 때마침 나온 좋은 새 앨범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예전부터 오랫동안 꾸준히 질리지도 않고 들었던 노래들을 담아 왔다. 여행에 관한 것이라면 역시 이거지. 자연스레 손가락을 들어 김동률의 출발을 눌렀다.


‘아주 멀리까지 가보고 싶어.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아주 멀리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페라, 때 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며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그렇게 나는 떠나네. 더 넓은 세상으로.’


아직 스스로의 욕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던 15살.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나지막하게 직감했다. 내가 평생 이 노래처럼 살기를 갈망할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나만의 상상 속에서 세계를 확장해 나가며 언젠가 세상의 모든 땅을 밟아 봐야지, 결심하며 살던 어느 날. 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교수님으로부터 잊지 못할 문장 하나를 얻었다. '독만권서, 행만리로.'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여행하라. 이런 노래와 문장들이 내 속을 채워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왔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랬다.

세랄베스 중앙 정원의 풍경

그렇게 조용히 앉아 노래를 듣다 보니 몸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뻑뻑했던 눈도 조금 부드러워지는 듯했다. 여행을 시작하기로 한 처음 그 마음 가짐을 잊지 말아야지. 비록 때로 고단하고, 나약한 체력의 나의 발목을 붙잡아도 여행을 부정하지는 말아야지.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미래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지. 서서히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따뜻함을 느끼며 감사하기 시작했다. 진짜 여행을 위한 출발은 여기서부터구나. 다시 발걸음을 재촉할 기운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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