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적인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겐

by 이재리

자유로운 향기가 날 것 같아, 나도 몰래 중얼거렸다. 리스본 코메니우스 광장 한편에 앉아 밀려오는 강물을 바라보며.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느끼며. 그러나 즉흥적인 여행을 하기란 쉽지 않다고, 나는 그러기엔 너무 가난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어젯밤 늦게 CP(Comboios de Portugal, 포르투갈 국영철도)를 타고 리스본 산타 아폴로니아 역에 도착했다. 꽤 색다른 풍경의 지하철을 타고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안도했다. 여기는 일단 4인실에다가, 개인 침대별로 커튼이 딸려 있고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딸려 있구나. 특이한 건 숙박비에 도시세가 딸려 온다는 점이었다. 도시마다 있는 곳도, 없는 곳도 있었지만 리스본은 1박에 2유로의 도시세를 내야 했다.

밤 12시에 가까운 늦은 시간에 숙소에 도착했던 터라 체크인을 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로비에 바로 직원이 앉아 있어 무리 없이 체크인할 수 있었다. 체크인 도중 재채기를 하는 그에게 버릇처럼 ‘Bless you!’를 외쳤는데 그는 고맙다며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문이 열릴 때마다 바람이 많이 들어와서 힘들다든가, 한국 사람들은 열이면 열 모두 침대 1층을 선호한다든가, 매주 수요일마다 와인 테이스팅이 있으니 경험해 보라든가 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 있다는 걸 확인하는 또 하나의 순간이었다.


새벽같이 눈이 떠져서 7시가 되자마자 조식을 먹고 일찍 길을 나섰다. 리스본은 생각보다 훨씬 큰 도시였는데,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살면서 거듭 깨닫게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나에게 있어서 도시는 클수록 좋다는 것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가게와 식당, 카페, 그 주위를 채우는 사람들의 풍경과 그 가지각색의 사연이 좋다. 바라보기만 해도 더 열심히 살고 싶은 기분이 든다.

조르주 성으로 올라가던 길. 색이 예쁜 건물들

먼저 천년이 된 고성 상 조르주 성으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에 주변 건물 발코니에 끝없이 널어놓는 빨랫감들이 눈에 띄었다. 그와 더불어 형형색색의 밝은 페인트 색, 그 사이를 촘촘히 채우는 여러 종류의 꽃들까지 남유럽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 덕에 높은 전망에서 바라보는 리스본의 풍경이 끝도 없이 근사했다. 조르주 성은 가만히 앉아 보고 있으며 기원 전후의 세상이 절로 상상되는 신기한 곳이었다.


성에서 내려와 근처의 작은 식당에서 Bifana라고 하는 샌드위치를 먹었다. 샌드위치라고 하기 애매할 만큼 빵 사이에 끓인 돼지고기를 넣어준 것이었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곧바로 리스본 대성당을 돌아보고 내려와 코메니우스 광장으로 향했다. 오늘 둘러보기로 계획한 3곳을 모두 보고 나자 갑작스럽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막연함이 밀려왔다. 말했듯이 나는 J 98%의 인간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유 앞에 허공만 바라봤다.

“나 이제 뭐 하지?”

그런 말을 육성으로 내뱉으며 방파제에 앉아 근처 버스킹 음악을 듣고 있으니 내 앞쪽에 앉아 있는 한국인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사진을 핑계로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걸었다. 우리는 서로 사진을 열정적으로 찍어준 뒤 나란히 앉아 각자의 사연을 나눴다. 그의 이름은 다영. 회사를 다니다 이직을 하게 되었고, 그 사이 시간이 좀 생겨서 여행을 오게 되었다고 했는데 특이한 건 리스본이 벌써 3번째 방문이라는 것이었다.


얘기를 하면서 알게 된 다영 씨의 가장 큰 특징은 여행을 하면서 돈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한정된 시간과 예산 안에서 여행을 계획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자칫 예민해지기 쉽고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종종 후회하기 마련인데, 다영 씨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도시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할 관광지나, 반드시 맛봐야 할 음식들에 관해서도 의연했다. 늦잠을 자서 예약한 기차를 놓쳐도, 실수로 잘못 예매해서 티켓을 날려도 괜찮다고 말하며 오히려 웃었다. 그런 게 다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냐며.


처음 만난, 그리고 다시 못 볼 사람 앞에서나 떨어보는 재간이나 농담 같은 게 아니었다. 못 먹는 포도가 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신 승리의 유형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만의 여행 방식이 있고 그게 ‘가성비 떨어지는’ 것이라 해도 유쾌하게 넘기는 삶의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 함부로 욕심내지 않는,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져보겠다고 무리하는 않는 사람의 그 어떤 편안함을.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시하고 그 외의 것들은 흘러가는 대로 흘려버리는 마음 가짐도 말이다.

평생 잊지 못할 일몰 중 하나였다.

나도 그런 여행자가 될 수 있을까? 다영 씨와 헤어진 후 홀로 코메니우스 광장 한 편에 위치한 식당에서 맥주 한 잔을 사든 채, 지는 노을을 보며 생각했다. 그런 자세는 노력해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그런데 이것 또한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져보겠다는 욕심이 아닐까 갸우뚱하면서 말이다. 해가 다 지고 나서 내린 나의 결론은 불가능 : 98%였다. 애초에 나에게 그런 너스레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여행만 해도 그랬다. 나는 리스본에서 2박을 계획했지만 막상 와서 본 리스본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중에 있을 그라나다를 포기하고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선택지를 가져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했을 경우 J 98%의 내가 미리 예약한 숙소의 숙박비와, 투어 비용을 모두 날리는 셈이었는데, 그건 용납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아니었다. 나는 리스본이 천국보다 좋았을 경우에도 분명 예정대로, 지불한 방향대로 움직였을 것이다.


다영 씨처럼 살기에 나는 너무 적게 벌어, 하고 웃어넘겼지만 사실 어느 쪽이 더 큰 건지는 여전히 모른 채로 남아 있다. 내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내 성미마저 여유가 없어진 건지, 애초에 그런 선택지를 고려하지도 않을 만큼 계획적인 성향이 문제인 건지. 마음 한편에는 후자라고 믿고 싶어 하면서도 말로는 전자를 탓했다. 둘 다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리라는 것만은 확신했다. 그저 저런 삶의 방식도 있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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