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아무리 선택의 연속이라지만

by 이재리

이건 너무 잘못된 선택임에 분명했다. 나는 어리석었다. 어리석고 순진했다. 나는 나를 너무나 과대평가한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는 나를 말렸어야 했다.

아무도 없이 깜깜하기만 했던 세비야의 오전 6시.

이른 새벽 6시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인 세비야 거리를 나와 캐리어가 함께 걸었다. 돌길에 캐리어 바퀴가 불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지속적인 파열음을 냈기 때문에 내심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거리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으나, 사람이 많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캐리어 소리가 크게 들렸으려나 싶기도 했다. 어쨌거나 민망함에 오히려 추위가 조금씩 불식되어 가던 찰나 불 켜진 숙소를 찾아 문을 활짝 열었다.


“Hola!”

스페인으로 국경을 넘으며 간단한 스페인어를 익혀두었다. 포르투갈에 있는 내내 현지 언어를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음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에서는 인사와 감사 표현 정도는 그 나라 언어로 해야지, 다짐하며 혼자 올라! 와 그라시아스! 를 여러 차례 연습한 끝에 실제 상황에서도 무리 없이 내뱉을 수 있었다.


“혹시 짐을 먼저 맡겨둘 수 있을까요?”

카운터에는 마침 심심해 보였던 스태프가 나를 향해 크게 미소 지었다. 그는 약간의 보증금을 받고 짐을 보관하는 락커의 키를 내주었다. 그런 후 체크인 시간과 숙소 로비 및 이용 시설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는 아직 아침이 이르니 조금 쉬라고 안내해 줬다. 식당 한 편에 앉아 짐을 정리하고 있는 내 곁으로 와 여러 말을 건넸지만 대화를 하기에는 너무 피곤한 상태였다. 나는 적당히 대답한 후 그대로 테이블 위에 엎드려 버렸다. 무엇보다 몸을 어디에든 좀 뉘이고 싶다는 열망이 간절했다.


지난밤 9시가 넘어서 숙소를 나섰다. 그 시간 대에는 숙소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이 날만큼은 달랐다. 리스본 오리엔테 역에서 밤 10시 반에 출발하는 야간 버스를 타고 세비야까지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비야에는 오전 6시경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시차를 감안하면 약 6시간 30분가량의 이동이었다. 비행기에서도 14시간 가까이 앉아서 자고 가는데 6시간 조금 넘는 게 힘들어 봤자 얼마나 힘들겠어, 뭐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예매했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리스본에서 세비야까지 저가 항공을 타고 이동하는 방법과 야간버스를 타는 방법. 저가 항공을 타면 체력과 시간을 아낄 수 있었지만 비행기 편이 애매했다. 가격대가 야간버스에 비해 4~5배 정도 비쌌지만 공항까지 이동하고, 공항에서 대기하는 시간까지 합친다면 4~5시간은 역시나 잡아야 할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야간 버스는 조금 불편할지언정 훨씬 싸고 하루치 숙박비를 아낄 수 있었다. 버스 환경에 금방 적응한다면 눈 감고 뜨면 도착해서 활기찬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나를 너무 몰랐다. 물론 나에게는 약 5시간가량의 야간 버스와 7시간가량의 야간열차 탑승 경력이 있다. 그때는 모두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벌써 10년 전 이야기고, 나의 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그것이 되어 있었다. 버스에서, 그리고 숙소에 도착해 앉아 있는 동안에도 내 등짝과 허리와 무릎은 어쩔 줄 몰라했다. 비단 6시간의 버스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포르토의 낡은 숙소에서 밤을 보냈던 날부터 어쩌면 예견되어 있던 감기가 어제부터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목이 지나치게 칼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콧물이 되어 나오더니 심한 오한과 근육통을 동반하며 여행의 질을 제대로 떨어트렸다. 밥을 먹거나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 살짝 나아지는 듯했으나 오래 걸으면 시작되는 허리 통증과 함께 몸 상태를 점차 악화시켰다.


지난밤 리스본 오리엔테 역으로 출발하는 지하철 역 앞에서, 지하철이 들어오며 내는 바람에도 온몸이 일그러질 만큼 괴로워했다. 이런 날은 모든 걸 취소하고 필히 누워서 쉬어야만 했다. 그러나 내게 쉴 숙소가 있었는가? 없었다. 내게는 오직 좁은 야간 버스만이 남아 있었다. 버스에서 온전히 자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절반은 깨어 있는 채로 멀뚱 거리다 보니 세비야에 도착한 것이었다.

동이 트기 직전의 스페인 광장

체크인은 오후 1시였다. 다른 숙소에 비하면 빠른 편이었지만 앞으로 7시간은 더 버텨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결국 엎드려서 시간을 보내다 8시가 됐을 무렵 일출을 보러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다. 당연히 근사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새벽녘의 강렬한 추위를 어떻게든 이겨내기 위해서 광장 근처를 조깅하듯 뛰어다녔다. 동이 튼 후 근처 카페에 가서 아침을 먹고, 10시가 넘은 시간에 알카사르에 입장해 한 바퀴 돌아보고(그마저도 절반 이상이 양지에 앉아 쉬는 것이었다) 돌아오니 12시가 넘었고, 나는 스태프를 재촉해서 최대한 빨리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갔다.

따뜻한 곳만 골라다녔던 알카사르

들어가자마자 옷도 갈아 입지 못한 채 누워 3시간을 연달아 잤다. 식은땀을 계속 흘려가면서 자고 또 깨고 다시 잠이 들고를 반복했다. 오후가 되니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바깥의 햇볕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따뜻한 공기를 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말을 태우기도 했는데 말발굽 소리가 ASMR처럼 듣기 좋았다. 서서히 녹아드는 몸을 느끼며 생각했다.


무리하지 말아야지. 잘 먹고 적당히 걸어야지. 내 몸은 내가 챙겨야지. 인생이라는 것이 꼭 그렇다. 아프다고 해서 대신 아파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 건강을 뒷전으로 여기며 열심히 노력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병뿐이다. 인생이 꼭 여행과 같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적당히 즐기는 것이라고,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추운 몸을 녹여줬던 카푸치노. 자주 멈춰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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