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우리 딸 온다고 신경 좀 썼지-“
오랜만에 본 엄마는 폭삭, 늙어 있었다. ‘폭삭’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거구나, 싶을 만큼 폭삭. 무언가가 속에서 주저앉아 버린 사람처럼 폭삭. 식탁 한가운데에 커다란 냄비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서 백숙이 끓고 있었다. 엄마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메뉴였다.
나는 물에 빠진 고기는 좋아하지 않는데.
식사를 하는 내내 엄마는 자신의 근황과 친척들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식탁 앞에 앉아 있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결말을 듣기 위해서 지루한 서론과 본론을 견뎌야 하는 것처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남편이 누군지 알기 위해 기나긴 16화를 버텨야 하는 것처럼.
“그래서 이직은 어느 쪽으로 하려고? 아무래도 수도권 쪽이 일자리가 많겠지?”
식사를 마치겠다는 신호로 수저를 내려놓자마자 엄마는 말했다. 마치 결말을 먼저 알고 드라마를 보려는 사람처럼 한쪽 다리를 접어 올린 후 잠깐의 정적이 흐른 틈을 타 가장 궁금했던 말을 꺼낸 것이다.
“그게, 엄마.”
조금 뜸을 들였다. 이 말을 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일말의 죄책감이 나의 혀 끝을 붙잡았다.
“나 다시 임용 준비하려고.”
아, 그때 엄마 표정이 어땠더라. 하늘이 무너진 표정, 아님 나라 잃은 충신의 표정.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몇 초 후 엄마가 울음을 터뜨렸던 것은 기억난다. 엄마는 울었다. 아이처럼, 가장 아끼고 아끼던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펑펑. 눈만 펑펑 오는 게 아니구나. 사람도 펑펑 오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우는 엄마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엄마는 한참을 울다가 이제야 진정이 됐다는 듯 말했다. 당신은 어려서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는데 못 했다고, 그땐 시절이 안 좋아서, 형편이 되지 않아서 할 수가 없었다고. 그러니 너 만큼은 꼭 하고 싶은 만큼 하라고 말이다. 그 말에 진심이 얼마간 들어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얼마간의 시간을 흘려보낸 후 식탁 위에 널브러진 식기와 그릇을 치우려 일어났다.
사실 알고 있었다. 엄마가 우는 이유, 그건 다 돈 때문이라는 걸. 내가 회사 다니는 동안 엄마에게 주었던 얼마 안 되는 그 돈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이제는 돈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지긋지긋했다. 지긋지긋한 돈이 자꾸 우릴 지긋지긋하게 울려. 나를 울리는 건 괜찮은데, 그래도 우리 엄마는 안 울렸으면 좋겠는데. 엄마를 폭삭, 늙게 만든 건 혹시 또 돈인가.
우는 일마저 지긋지긋해,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탈출하고 싶었다.
방에 들어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산에서의 원룸을 정리하며 나온 박스는 대략 6개 정도. 박스 3개는 옷이 가득 차 있었고, 나머지 3개는 책과 각종 생활 용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한참을 정리해도 한참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지쳤을 때쯤 엄마는 조용히 옷걸이를 한 움큼 들고 들어왔다. 박스에서 옷을 꺼내 옷걸이에 끼워 붙박이장에 넣기 시작했다. 엄마가 딸 온다고 미리 맞춰 놓은 새 하얀 붙박이장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정리를 얼추 끝내고 거실로 나가 엄마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이제 반전을 줄 차례였다. 엄마가 좋아하는 반전.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이야, 마지막에 그런 반전이 있었다니까, 하고 몇 번이나 얘기하며 좋아하는 그 반전.
“생활비는 전처럼 매달 말에 송금할게.”
순간 엄마의 눈이 커지며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뭐?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엄마는 자기 말에 자신이 없는 사람처럼 말 끝을 흐렸다. 싫다거나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정도 돈은 모아 놨어. 걱정하지 마.”
엄마의 얼굴을 폭삭, 늙게 하는 게 아니라 살짝, 아니 활짝, 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여리고 어린 여자의 얼굴에 눈물이 아니라 웃음만 가득하기를, 종종 듣던 ‘엄마가 우리 딸 덕에 호강한다니까?’ 뭐 그런 말을 다시 들을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웃으며 이 날을 떠올릴 수 있도록.
그렇게 나의 임용 공부는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