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리 Oct 25. 2023

무기여 내게 오라

   나보다 1년 정도 늦게 입사한 옆자리 후배는 의자를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How may I assist you?”

   그리곤 눈이 휘어지도록 웃었다. 헤헤, 뭐 그런 소리를 냈었나. 양손을 어깨 위로 올리며 으쓱- 한 건 확실히 기억이 난다. 아, 조롱이었다. 그건 명백한 조롱이었다.


   그러나 더 나쁜 건 내 쪽이었다.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요. 전 그 정도도 못해요.”

   그건 비웃음보다 더 나쁜 자기 비하였다. 나도 혹시 웃고 있었나.


   후배는 조용히 돌아섰지만 내 앞에는 굴욕감이 놓였다. 영어를 원어민처럼 하던 후배도, 짧은 영어로 밥 벌어먹던 나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합리화한 그 일이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마치 쉽게도 날 것을 까먹으려던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영화관에 가서 내 자리도 아닌 자리에 앉았다가 누가 와서 거기 제 자린데요, 하고 말한 기분이었다. 자격도 없는데 요령을 부리며 살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되겠지, 알고는 있지만.




   그게 내 잘못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세상은 비상경 문과에게 너무 야박해. 얼마나 야박한지 글쎄 일자리 하나를 안 줘. 일자리를 주면 돈을 안 줘. 돈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주면 시간을 안 줘. 그러니 내가 전공도 아닌 영어를 길거리에서 배워서 일하는 데 써먹고 있지. 이건 명백히 세상의 잘못이야.


   다만 그렇게 일기를 쓰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기는 간 것 같았다. 나는 되는 않는 영어로 밥 빌어먹는 행위가 지긋지긋했고, 이제는 일기를 쓰는 대신 무언가를 해야 할 시기임을 느꼈다. 몇 개 국어를 원어민처럼 하는 후배들을 원망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전문성을 가져야 할 때였다.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 회사는 이쪽 업계에서 나쁘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연봉으로 따지면 최고 수준이었다. 해외영업, 이라고는 하지만 실상 손 빠르고 엉덩이 무겁고 꼼꼼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신입 사원을 뽑으면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처럼 관련 전공이 아니더라도 토익 성적과 회화 면접만 통과하면 붙는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위를 보면 얘기가 달라졌다. 내 윗자리를 올려다보면, 대리급만 가도 여자가 없다. 다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라져 버리고 없다. 결국 한 줌만큼 뽑혔던 남자 사원들이 대리를 달고 차장, 부장, 나아가 임원이 됐다.


   내가 여기 더 있으면, 아무리 인정받고 일한다 해도, 대리 달면 나가리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숨 쉬듯이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게 남겨진 건 일말의 굴욕감, 일상의 회의감, 막연한 불안감, 그런 것들 뿐이었다.

   야근을 하는 날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정말, 정말 아니었는데.”




   며칠 뒤 옆자리 사수와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던 중 사수가 그런 말을 꺼냈다.

   ‘우리 회사는 전부 Generalist 뿐이잖아요.’

   사전적으로 나쁜 말은 아니었다. 다방면에 걸쳐 많이 아는 사람, 즉 여러 분야를 대체적으로 잘하는 사람을 뜻했다. 그러나 사수는 나쁜 말로 썼다. ‘전문성 없는 사람들’ 즉, 몇 년을 일해도 특출 난 장기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술자리에서는 비슷한 푸념들이 오갔다.

   ‘이 바닥에 오래 있는다고 무슨 능력이 더 갖춰지는 건 아니야, 노하우는 좀 생기겠지. 그래도 일은 신입들이 더 빠르게, 새로운 방식으로 잘 해낼걸?’

   ‘나이 먹고도 민망하지 않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Specialist의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 나만의 무기가 있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하고 싶었다. 그 어느 차가운 밤에도 고용 불안에 떨며 잠들지 않을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갖고 싶었다.


   퇴근길에는 습관적으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나만의 무기, 나만의 강점, 그런 게 도대체 뭐가 있을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외국어는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이전 01화 마음 뒤에 사람 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