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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Nov 01. 2023

비상구는 어느 쪽인가요

   꿈을 꿨다. 아주 깊고 커다란 미로를 한참이나 헤매는 꿈을. 계속해서 같은 선택지를 마주했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그래, 너는 어느 쪽이야? 실타래가 필요해! 그렇게 속으로 외치니 위에서 실타래가 뚝, 떨어졌다. 좋았어, 이거면 나도 이깟 미로쯤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꿈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오전에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계속 미로를 헤치고 나아가는 환영이 모니터 위로 비쳤다. 뒤에서 누군가 ‘오늘은 돈가스?’ 하고 말하는 걸 듣고서야 정신이 차려졌다. 점심, 그래 일단 먹어야지. 그런데 왜 하필 이 주임이 뒤에 서 있는 걸까. 이 주임은 우리 층에서 한탄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 중에 하나인데. 안 그래도 시끄러운 속을 얼마나 더 뒤집어 놓으려고.

 

   “내가 어제 오랜만에 동창회에 다녀왔는데 말이야.”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 이 주임.

   “고등학교 때 절친 녀석이 고등학교 선생님이 됐더라.”

   어, 뭐?

   “방학에, 연금에, 아주 걱정할 게 하나도 없대.”

   아니 이 주임은 왜 그런 얘기를 지금 하고 그래?

   “얼굴이 폈어, 아주 훤-해졌어.”

 

   이 주임은 훤-해졌다고 말하며 고개를 살짝 올리고 얼굴로 반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뭐 어쩌라고? 조용히 이 주임을 응시하며 눈썹을 구겨 보였다. 다행히도 내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이 주임 말에 딴지 걸기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처럼 가만히 앉아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팀 동기는 요즘 선생님은 옛날과 다르다며 반박을 하고 나섰다. 순간 동기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교권 하락한 지 오래고, 요즘 애들 완전 오냐오냐 하며 커서 지들 잘난 줄만 안다고. 학부모들은 또 어떤지 아느냐, 동기는 자기 친구가 중학교에서 일하는데 학부모 민원에 스트레스를 안 받는 날이 없다며 여느 직업에나 힘든 점은 있는 거라고 훈수를 두듯 말했다. 이 주임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불쌍한 이 주임.

 

  침묵 속에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다시 미로 속이었다. 왼쪽이야, 오른쪽이야? 회사원이야, 선생님이야?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반차를 올리고 2시가 되길 기다렸다. 성실한 회사원은 기분이 좀 울적하다고 해서 마음대로 회사 밖으로 튀어 나갈 수 없다. 시스템과 절차가 나를 용인해 주길 기다려야지. 2시가 되자마자 인사를 하고 나와 향한 곳은 다대포였다. 다대포, 세상의 절반이 다대포래도 다대포의 살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그 다대포.


   맨 처음 다대포에 온 것은 약 2년 전 즈음, 어렵게 입사한 회사를 두 달 만에 관두고 나와 다시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그때만큼 내 자신이 초라하고 조급했던 적이 있었나, 누가 옆구리만 쿡 찔러도 눈물이 나던 시기였다. 친구를 만나서 치킨 한 마리를 시켜도 차마 먼저 돈 내겠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던 날들. 편의점에 김밥 한 줄을 사서 하루를 때우며 자기소개서를 쓰던 날들.

 

   그랬으니 그 당시 다대포 바다를 처음 보고 울지 않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사실이 억울해 분하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그날에 마주한 다대포 바다는 넓고 넓어서, 그러니까 너무 넓어서 다른 세상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넓어서 잠시 현실로부터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바다로부터 지면의 경사가 매우 낮아 이리저리 치는 바닷물이 잔잔하게 찰랑거렸다. 여러 방향으로부터 달려온 파도의 물결이 서로 겹쳐지고 엉기면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만들어냈다. 마치 하나의 전시 같았다. 또 일몰이 질 때는 얼마나 아름다웠나. 양쪽으로 산이 바다를 감싸고 있어 그 너머로 해가 넘어갈 때면 안 그래도 찬란하던 윤슬이 눈이 부시도록 일렁거렸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 부산에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실은 부산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채 2년이 되지 않다 다시 다대포 바다를 찾았다. 마음이 어디서부턴가 꾹꾹 눌려 곧 터질 것 같아서. 자꾸 속에서 알 수 없는 응어리가 뭉쳤다. 계속 울고 싶은 기분인데 막상 눈물은 나지 않았고, 도저히 좀이 쑤셔 가만히 못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다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졌다. 내 안의 어딘가가 단단히 틀어진 게 분명했다. 아마 또 찾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내 인생에 갇혔다는 기분, 내지는 확신이. 다시. 나를.


   선택을 해야 했다. 어느 쪽인가요, 탈출하려면 비상구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다를 걸으며 한참을 물었다. 언제나 대답 없는, 어디에 있는지 모를 신을 향해. 묻고 또 물었다. 신께선 언제나 대답이 없으셨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건 언제나 내 쪽이었다.


   그리고 내 길을 찾는 것, 그것도 언제나 내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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