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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Jan 31. 2024

종이 울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10시가 조금 넘은 이른 밤, 일찍 잠자리에 누우며 생각했다.

   ‘잠들 수 있을까.’

   지난 한 달 동안 새벽 늦게까지 일하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서서히 기상 시간을 앞당겼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버릇을 몸에 들여놔야 시험장에 가서 최상의 컨디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태연한 입꼬리와 다르게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렸고, 바로 내일이 결전의 날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쉽게 지울 수 없었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짓은 다 하고 누운 자리였다. 저녁 즈음엔 러닝화를 신고 나가 한 시간 가까이를 걸었다. 교생 실습을 나갔던 대학 시절의 어느 날, 다음 날 수업 실연을 앞두고 너무 떨려서 주체를 못 했던 밤 바깥을 나서 걸으면서 스스로를 진정시켰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편의점에 들러 내일 시험 도중에 먹을 간식거리를 사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집에 돌아와 좋아하는 웹 드라마 ‘퐁당퐁당 L.O.V.E’를 틀어 놓고 짐을 싸두기까지 했다.


   며칠 전 마지막 모의고사 강의를 마무리하며 선생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이제 다 같이 능선에 올라왔다고. 정상이 코 앞이라고. 그리고는 덧붙이셨다. 어차피 다 점수 컷 근처에 몰려 있다. 당일 날 실수 하나 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에 불과하니, 실수만 하지 말라고. 그 말을 떠올리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아미타불을 외웠다. 이 또한 선생님이 전수해 준 방법이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아미타불 네 글자를 딱 스무 번만 외워보라고. 그러면 금방 잠이 들 거라고.




   새벽 5시부터 눈을 떠 준비를 했다. 시험장은 다른 지역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이동해야 했다. 전날 미리 이동해서 숙박을 잡고 시험을 치러 가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으나, 잠자리를 많이 타는 나로서는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집에서 잠을 자고 가는 게 컨디션 조절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고 당일 아침 일찍부터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택시를 불러 터미널로 이동해, 금방 버스표를 예매하고 플랫폼 앞에 서 있었다. 아직 사방은 깜깜해 현실감각이 없었다. 내가 정말, 시험을 보러 가는 건가. 어느새 초겨울에 진입한 날씨 덕에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 또한 주머니 속의 핫팩을 만지작거리며 어서 버스가 우아한 몸짓으로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그때 왜 하필 그런 생각이 났을까. 문득, 쿠알라룸푸르의 한 지하철 역 플랫폼에 서서 면접장까지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던 아침의 공기가 떠올랐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플랫폼은 많은 인파로 북적거렸고 그 사이를 습한 공기가 채웠었다. 해가 밝게 났었던가, 면접 예상 질문과 답변을 빼곡히 적어 둔 종이가 가방 속에서 내 손으로 왔다, 갔다, 반복했다.


   ‘내 노력들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빛바래지 않을 거야.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어디서나. 최선을 다했으니까 괜찮아. 언젠간 나도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세상에 가 있을 거야.’

   곧이어 버스가 들어오고 재빠르게 가장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은 히터가 세게 틀어져 있었고, 처음에 선명했던 바깥 풍경은 점점 창문에 김이 서려 희미해져 갔다. 마침 창 밖으로는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햇빛이 차 안을 비추기 시작했다. 차 안이 서서히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창문을 손으로 문지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 지는 해를 보며 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혹시 울고 있지는 않을까. 여전히 인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가방에서 요약집을 꺼내 펼치곤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다행히 버스에서 책을 봐도 멀미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잠들었던 뇌를 깨우며 기억 저편에 담아 두었던 용어와 사건, 인물, 지명 그런 것들 것 빠르게 되새기기 시작했다. 잊어버리면 안 돼. 적어도 오늘만큼은 단기 기억이 큰 힘을 내주길 기도했다. 중요한 순간에 나를 도와줬던, 언제나 시험 운만큼은 좋았던, 그걸 가능하게 했던 두뇌. 강렬한 히터의 열기에 잠시 잠이 들었다가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에 다시 눈을 떴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이어폰을 꼈다. 쿵, 쿵 거리는 음악 소리에 맞춰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넌 이 판을 뒤집기 위해서 왔어.’

   가사마저 내게 응원의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지도 어플을 통해 가는 길을 확인하고 방향을 잡아 길을 나섰다. 터미널에서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학교가 위치해 있었고, 이미 시험장 앞은 시험을 치러 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응원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대게 이런 때 누구의 응원도, 직접적인 기다림도 받아본 기억이 없어서 그러려니 하며 정문을 통과했다. 문득 올려다본 곳에 펄럭이고 있는 현수막이 오늘을 말해주고 있었다.


   손 소독에 발열체크에, 고사장 확인까지 사람들은 줄을 지어 그 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엔 파란색의 부직포 덧신을 신고, ‘역사 13!’ 고사장을 외치며 교문을 통과해 건너편 건물로 이어진 2층의 통로를 지났다. 복도 가장 끝 편에 위치한 고사장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지나가면서 창문 너머 고사장에 미리 와 앉아 공부하고 있는 수험생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가 제일 간절할까. 누가 여기서 가장 절실할까.


   시험 시작 약 30분 전에 시험장에 도착해 앉았다. 내 자리는 교실의 가장 왼쪽, 그중에서도 가장 앞쪽에 위치한 1번 자리였다. 차라리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좋았다. 중간 자리보단 복도 쪽 가장자리가, 그보단 창가 쪽 가장자리가 좋았으니 자리 운은 좋은 편이었다.


   곧이어 감독관이 들어왔고, 핸드폰과 소지품을 제출한 후 조용히 기다렸다. 책상 위로 시험지와 답안지가 놓이고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까지 고요와 적막 속에 시간이 흘렀다. 이제 시작이다. 지난 5개월의 성과를 마음껏 뽐내 보여주겠다.


   종이 울렸고, 서둘러 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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