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리 Jan 24. 2024

강조되고 반복되는 생각은 수험생을 불안하게 만들어요

   커튼을 걷어보니 문득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어어, 어서 와, 이미 가을인데, 몰랐지? 그런 눈빛으로 거리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에어컨이 마땅치 않아 더위로 고생한 게 엊그제 같은데 밖은 벌써 찬바람이 불고 나무는 온통 형형색색의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완연한 가을을 통과하고 있었다. 아, 나는 가만히 앉아 과거 속 시간을 들여다보느라 바빴는데, 현실의 시간은 여전히 자비도 없이 흘러가 있었구나. 괜히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주방으로 나가 커피를 인스턴트 탔다. 커피 가루를 컵 바닥이 채워지도록 붓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공기 중에 커피 향과 따뜻한 수증기가 퍼졌다. 컵을 양손으로 감싸며 창밖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이다. 합격하는 순간을 상상하고, 또 간절하게 기도하기를. 틈만 나면 두 손을 꼭 모아서 어느 쪽에 있는 지도 모를 신에게 구걸한다. 저는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다 하고 있으니까 제게도 한 번만 운을 주세요.


   그리고 또 수십 번이다. 떨어져도 괜찮을 수 있게 정신을 단단히 잡아 둬야지, 미리 그 아픔에, 슬픔에 적응해 둬야지, 다짐하기를. ‘불합격’을 확인하는 순간 세상이 아득해져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도록, 미리 마음 단단히 먹어 둬야지. 그런데 이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라서, 연습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나는 그 허탈함과 허무함을 넘어서는 절망감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시험까지 약 2주 정도의 시간을 남겨두고 문득, 모든 것이 서둘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끝맺음 짓기도 전에 모든 것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끝나고 나서 맞이할 결과가 두려웠다. 불안할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불안해한다는 시기, 아마 모두가 나처럼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매일 밤 오지 않는 잠과 한참을 싸우다 잠이 들겠지. 다들 그렇겠지.




   잠이 쉽게 오지 않는 밤에는 지나간 날들을 떠올렸다. 작은 방 안에서 연인과 단 둘이 붙어 앉아 우습거나 감동적인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맥주를 홀짝이던 날들. TV 속 멋진 풍경과 아름다운 노랫가락을 들으면서 괜히 코 끝이 찡해졌던 날들. 그날들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온기를 떠올리고 그리워했다. 별 거 없이도 잘 웃던 날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도 크게 반응하고, 깊게 생각하고, 그러다가 또 다른 자극에 주의를 빼앗기길 바쁘게 반복하던 날들. 그런 일상적인 날들을 그리워했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다른 선택지가 내게 존재했었을까? 내가 현실에 만족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그곳에서도 매달 곱게도 나오는 월급이나 차곡차곡 모으고 주식으로 돈을 불리고, 매일 출근할 수 있는 회사가 있음에 감사하고, 그러면서도 쉬는 날에는 여기저기 혼자서 잘도 쏘다니면서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면 내게는 그곳에서 남겠다는 선택지를 가질 수 있었을까. 아, 나는 누구에게 자꾸만 무얼 묻는 걸까.


   그때 만약, 이걸 다 감당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더라면. 1년이든, 2년이든 아니 4년이 걸리더라도 선생님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쯤 그 따뜻한 날들 속에서 생각 없이 웃고 있을 수 있었을까. 연인과의 얼마 남지 않은 정을 붙잡고 안정감에 안주할 수 있었다면, 저 멀리 창문 너머 펼쳐지고 있을 미래를 기대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또 어디로 어떻게 놀러 갈까, 그런 계획을 짜고 있을 수 있었을까. 그가 운전하고 난 옆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젊은 날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을까.


   백 번을 내게 물어도 아니라는 대답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도 행복할 수 없었고, 지금도 이렇게 두렵고 무섭기만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오지 않을 날들의 행복을 기다리는 처지일까 두려웠다. 이러다가 영영 선생님도 못 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도 못할까 봐. 만약 올해 안 된다면 내년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공부해야 하지. 일을 병행해야 하나? 내후년에도 안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나?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할까?


   자꾸만 불안해지는 마음에 뒤돌아보고 후회하는 내가 미웠다.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어서 이 매분 매초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은 시간들이 흘러가기를. 어서 모든 일이 다 정리되고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웃으며 견디기엔 너무 가혹한 시간이었다.

이전 13화 미신을 건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