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리 Feb 07. 2024

모두 끝나버렸다, 시작도 안 해봤는데

   오전 10시가 넘어서 겨우 눈을 뜨며 생각했다.

   ‘이제 정말 다 끝났구나.’

   이제 더 이상 눈을 뜨자마자 책상 앞에 앉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시청해야 할 강의도, 봐야 할 책도, 외워야 할 단어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지난 5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일들이 모두 멈춘 후에도 여전히 관성의 영향으로 마음이 멈추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수많은 걱정들과 고민거리들이 피어올랐다. 당장 채점을 해야 할지 조차 알 수 없었고, 2차 실기 준비를 해야 할지, 아님 다시 1차 준비로 돌아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점수가 터무니없이 낮을 경우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빠른 시일 내에 있을 일반 공무원 준비에 도전을 해봐야 할지.

  



   “시험은 잘 봤어?”

   섭섭하게도 첫마디는 그거였다. 엄마도, 아빠도. 실은, 고생했다는 말이 먼저 듣고 싶었는데.

   “열심히 한 만큼은 본 것 같아.”

   시험장을 나서면서부터 생각했다. 엄마한테, 아빠한테 뭐라고 얘기를 해주면 좋을지. ‘뭐, 아무것도 아니었어’ 하며 능청을 떨 수도 있었고,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어, 망했어’하고 기대감 자체를 못 갖게 할 수도 있었지만 언제나 내 입 밖에 나오는 것은 그저 정직한 마음 그대로를 반영한 단어들 뿐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라는 걸, 버스 터미널로 걸어오는 내내 알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위에 수많은 길들이 생겼다 사라졌다. 수험생들은 말이 많았다. 문제가 쉬었다, 어려웠다, 새로운 유형의 문제 출제에 당황하기도 하고, 어느 문제의 답이 뭐다 갑론을박하기도 바빴다. 나는 언제나처럼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명확한 실수를 두어 개 정도 했다는 것 정도. 문제를 잘못 읽어서 2점이나 날리다니. 여기는 0.3점 차이로 합불이 갈리는 곳인데. 실수만은 하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못내 아쉬운 마음을 가다듬기 어려웠다.




   일단 과락이 아니라면 2차 준비는 무조건 하라는 말에 2차 스터디를 시작했다. 2차는 면접과 수업 실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면접이든 수업 실연이든 자신은 있었다. 어디서가 말 똑 부러지게 잘한다는 소리를 안 들어본 적이 없었고, 대학 시절 수업 실연을 여러 차례 했을 때마다 잘한다는 칭찬 한번 들어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교사가 안 되더라도, 설명하는 직업을 가지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처음 수업하시는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현직 선생님들처럼, 정말 잘하셨어요.”

   그런 말들에 익숙할 정도로. 1차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일단 1차만 붙으면 2차는 어떻게든 뒤집겠다는 게 나의 각오였다. 1차 성적이 조금 뒤떨어지더라도 2차 실기에서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합격해 주겠다, 뭐 그런.


   면접에 나올만한 예상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 각 시도 교육청의 정책을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교과서 분석을 시작하고, 지도안을 작성하고, 필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하는 걸 연습했다. 간이 칠판과 분필을 주문해서 방에서 혼자 수업 실연을 준비했으나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결국 되도록 같은 과목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스터디를 모집하기 시작했고 3명이 모이자 스터디 룸을 잡아 다 같이 모여서 직업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나만큼 잘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는데, 나와 다른 방식으로 잘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차분하게 수업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 유쾌함과 유머러스함으로 수업을 재미있게 풀어 나가는 사람 등 그들의 장점을 차근히 분석하고 흡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엇보다 떨지 않기 위해서 면접관들이 앞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하고, 또 했다. 꿈에서 면접관들을 앉혀 놓고 수업을 하기도 했다.




   스터디원들을 만나 수업 실연을 해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집으로 타고 가던 버스가 망가지는 경험을 했다. 버스 기사는 백미러로 승객들을 바라보며 크게 손짓했다. 이 버스는 운행할 수 없으니 내려서 뒤에 오는 버스를 타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시며. 버스에서 내리니 밖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다음 버스는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워낙 배차간격이 띄엄띄엄했다. 택시를 타면 2만 원 가까이 나올 텐데. 가만히 주머니 속 지갑을 만지작 거렸다.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음을 느꼈다. 1차와 2차 사이, 지나온 선택과 앞으로의 선택 사이에서 자주 선택을 떠올린다.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맞을까. 어떤 선택을 옳은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떤 선택을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한 걸까.


   길 위에 많은 길이 있다. 길과 또 다른 길 사이. 무수히 많은 방향으로 샛길이 나 있다. 선택하기 어려운 삶이다. 쉽게 한 발자국 내딛는 것이 이제는 불가능하다. 내가 가려는 길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는지, 한 걸음도 내딛지 않은 상황에서는 알 수 없다. 가보고, 돌아오는 수밖에 없더라도 일단은 가보고, 그러고 나서 결정하는 수밖에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그럴듯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최선을 다 하고, 그리고 난 후에 돌아오는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결단력과 과감함을 가지는 것뿐이다.


   ‘인생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또 무서워할 건 아니야.’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선택지를 향해 나아가자. 주머니 속 지갑을 꺼내 들며 나를 향해 다가오는 빈 택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전 15화 종이 울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