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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Feb 21. 2024

그 어떤 운명이라는 것에 관하여 (1)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상에 시간이라는 하나의 차원을 더한다면, 세상은 시간 순서대로 보일 것이라고 했다. 5차원 이상의 세상에 사는 사람이 4차원을 바라본다면 모든 일이 시간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을 거라고. 그래서 나의 기존의 가설은 굳어졌다.

   ‘일어날 일은 모두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이미 모든 일이 벌어져있고 우리는 그 일들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한 계단 한 계단 밟듯 따라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그걸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든 순리라고 부르든 간에 말이다.




   합격자 발표 이후로도 매일 새벽 3시가 다 돼야 겨우 잠이 들고 아침 10시가 넘어야 눈이 떠졌는데, 2차 시험을 보러 가기 전 날은 오후 11시도 전부터 잠이 들어 아침 4시 50분에 눈을 떴다. 전 날까지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 모든 게 피곤하게만 느껴졌는데, 이른 새벽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명쾌하게 맑았다. 낯설고 차가운 새벽을 맞이하며 서둘러 2차를 보러 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6시가 안 돼서 모바일 어플로 택시를 불렀는데 폭설로 눈이 잔뜩 쌓여서였는지, 너무 이른 새벽이라 그랬는데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발을 동동거리며 초조해하는 와중에 보다 못한 엄마가 지역 콜택시를 불러준 덕에 겨우 택시를 잡아 탈 수 있었다. 바깥은 영하 19도의 혹독한 추위가 번져 있었다. 택시를 타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해도 기차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바깥은 폭설.


   평소라면 15분은 걸리는 길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기차를 놓치느니 미리 기차표를 취소하는 편이 수수료를 아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핸드폰 어플을 통해 예상 도착시간을 계속해서 새로고침하며 확인했다. 다행히도 신호등이 도와준 덕인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아 기차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드로 계산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미리 현금을 준비하고 있다가, 역 앞에 도착하자마자 기사님께 건네 드리고 거스름 돈도 거절했다. 얼른 뛰어가 플랫폼에 도착하자마자 기차가 들어왔다.




   대기실에 들어가 앉아 있으니 나를 제외한 다른 지원자들의 모습이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역사 과목의 지원자는 나를 포함한 6명. 아무도 빠지지 않고 제시간에 도착했다. 희한하게도 떨리지는 않았다. 막상 닥치니까 얼른 끝내고 집에 돌아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 끝나고, 드디어 편안한 마음으로 따뜻한 전기장판에 누워 마음껏 책을 읽고 영화를 볼 생각에 신도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자의 면접 및 수업 실연 순서를 정하기 위해 제비 뽑기가 시작됐다. 속으로 간절하게 2번, 2번을 외치며 제비를 뽑아 조심스럽게 펼쳐 들었다. 실눈을 뜨고 살짝 보니 종이에 쓰여 있는 숫자는 ‘2번’. 아, 됐다. 컨디션도, 신호등도, 제비도 모두 오늘은 내 편이다. 누구보다 세게 부딪히고 돌아오리라. 강하고 굳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최종 임용합격자 발표는 2차 시험일로부터 2주 뒤였다. 그 2주는 빨간 맛과 파란 맛을 오가는 기상천외한 시간이었다. 면접 때의 질문과 나의 답변을 계속해서 돌아보게 만들었고, 수업 실연 때의 수업 내용이나 면접관들의 표정을 계속해서 생각나게 만들었다. 붙을까, 떨어질까, 하루에도 수백 번 스스로에게 묻고 또 답했다. 아무래도 떨어졌겠지. 아니야, 붙을 수도 있어.


   그러나 시험 전 날부터는 희한하게 누가 옆에 와서 말을 거는 기분이었다.

   ‘야, 너 붙었어.’

   증거도 없고 확신을 가질만한 일말의 거리도 없는데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미 모든 일은 일어나 있고, 이미 합격한 미래의 내가 불안과 초조와 씨름하며 싸우는 과거의 내가 너무 안타까워 얘기해 주는 거라면?


   일어날 일은 모두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말을 믿게 된 건 몇 가지 사건에서부터였다. 이럴 것 같다, 저럴 것 같다 촉이 좋은 편이 기본적으로 맞지만 남들이 들어도 신기하다 싶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토익을 처음으로 봤을 때였다. 점수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눈앞에 925라는 숫자가 맴돌았고, 실제로 약 3주 뒤에 925점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였다.


   처음으로 회사에 최종 합격했을 때도 그랬다. 처음으로 간 임원 면접에서 별 질문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희한하게도 붙을 것 같다고 중얼거리던 때, 결국 최종합격을 했다. 얼마 안 가 그 회사를 퇴사하고 다른 회사의 면접을 보게 됐었는데, 그때는 떨어지고 나서 계속 핸드폰을 쳐다봤다. 왠지 다시 전화가 와서 붙었다고 얘기를 할 것 같다는 느낌에서 그랬다. 그런데 결국 전화가 왔고 추가 면접을 본 후 합격했었던 적도 있다.


   혹시 이번에도 이 감이 들어맞지 않을까. 결코 작지 않은 기대를 품고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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