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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Feb 28. 2024

그 어떤 운명이라는 것에 관하여 (2)

   학교 공지사항 란에 들어가 합격자 발표 관련 글을 클릭했다. 첨부 파일을 열고, 손바닥 전체로 화면을 가렸다. 작년 합격자 발표 첨부 글의 파일을 보면서 몇 번이고 해왔던 연습이다. 과목 옆에 합격자의 수험 번호가 떠 있었고, 손바닥을 천천히 오른쪽으로 옮기며 내 수험번호와의 일치 여부를 확인했다. 마침내 마지막 두 글자를 남겨놓고, 내가 합격했음을 확신했다. 최종 합격이다.


   ‘아!’

   양팔을 위로 올려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입 밖을 나선 목소리는 ‘와아’ 하고 올라가지 못하고 짧은 신음에 그쳤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대신 두 손으로 얼른 얼굴을 덮었다. 합격의 기쁨보다 그 합격을 위해 쏟은 노력과 눈물이 먼저 생각났다. 그리고 최종 합격이라는 단어를 보기까지 느꼈던 수많은 불안과 초조의 감정들. 너무 고생했다고, 정말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 길로 거실로 달려 나가 엄마에게 합격 소식을 전했다. 방 안에서 우는 내 목소리만 듣고 불합격한 거라고 생각해 울상을 짓고 있던 엄마는 내 합격 소식에 나보다 더 즐거워하며 방방 뛰었다. 이제 더 이상 공부하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 또한 눈치 본다고 고생하지 않아도 되니 정말 잘 됐다고 말하면서.


   그런 엄마의 반응에 헛웃음이 나와 같이 방방 뛰고는 옷을 차려입고 러닝화를 신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좀 잠재우고 싶었다. 사실 잘 믿어지지 않았다. 꿈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실제로 하게 될 줄이야. 백 번을 다시 봐도 이 결과가 믿어지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이런 경사가, 이런 행운이 어떻게 나한테 올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보통 이런 행운을 누리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행복을 부러워하는 사람이었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쉽게 체념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다. 나는 언제나 죽도록 노력하고 그 노력에 겨우 걸맞은 결과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역사에서 5개월 공부하고 합격이라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면접도 수업 실연도 나쁘지 않았다. 온몸이 후들거리는 채로 들어갔던 면접에서는 일곱 가지 정도의 질문을 받았다.

1.     좋은 학교란 무엇이고, 좋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 본인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2.     자신의 교과와 연계하여 학생들에게 어떤 걸 가르쳐주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3.     교육 격차가 심해지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4.     학생들이 지각, 청소 빠지는 행위 등을 지속적으로 한다면 어떻게 지도하실 건가요?

5.     상담 시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6.     사람학교란 무엇인가요?

7.     이 학교에 지원한 이유와 이 학교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말해보세요.


   첫 질문에서부터 말문이 막혔다. 당연한 질문인데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학생들의 변화와 성장을 이끄는 학교라고 답했다. 이후의 질문들에 대해서는 미리 준비한 답변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특히 다섯 번째 질문, 상담 시에 가장 중요한 것인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다소 감상적인 답변을 했다. 진심이 가진 힘을 믿는다고, 진심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면접관 한 명, 한 명을 나눠 보며 답했다.


   수업 실연은 예상보다 수월했다. 교과서의 내용을 복사해서 나눠 주셨고, 30분 정도의 준비 시간을 주셨다. USB를 나눠 주며 PPT를 만들어도 좋다고 하셨으므로 나는 먼저 약 20장의 슬라이드로 이루어진 간단한 PPT를 만들었다. 학습 동기를 유발한 간단한 영상과 마무리에 형성 평가 문제를 포함했고, 실연에서는 이에 필기를 곁들여 수업을 진행했다. 도입부터 마무리까지 축약되어 있는 수업을 커다란 목소리로, 자신감을 가지고 또박또박, 절대 피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걸리지 않는 부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모든 과정을 마치고 옷과 가방을 챙겨 나왔을 때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구나, 내가 할 만큼은 해냈구나. 내가 붙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못해서 일 것이고, 내가 떨어진다면 누군가는 나보다 더 잘해서 일 것이라고. 어찌 됐든 좋은 경험이었고, 초수에 2차까지 경험해 볼 수 있었으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 중얼거리며.




   운동장을 10바퀴쯤 뛰다 걷다를 반복했을 때쯤 모든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자 이 감정을 잊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짜릿하고 강렬한 느낌 때문이라기보다는, 다시는 직업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곳에 가건 다 비슷하다는 걸 경험해 봐서 아니까, 내가 처한 현실 속에서 웃음을 찾고 꽃을 보려고 노력하며 그 속의 행복을 발견하며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서. 드디어 내 성에 차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그토록 노래 부르던 나만의 분야를 갖게 되었으니, 혹시라도 일에 싫증이 나고 회의감이 들 때면 이 날의 감정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이 모든 안절부절 끝에 신께 감사하다고 기도드리던 날의 마음을, 그리고 내가 다시는 불평불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사실도.


   이 직업이 가진 단점보단 장점에 초점을 맞추고, 누군가의 조롱이나 비난보다는 칭찬과 긍정적인 말들에 귀 기울이며 평생 최선을 다하자고. 그렇게 원하던 대로, 내가 원하는 만큼 공부하고, 늙어서 책을 못 볼 때까지 공부하고, 또 공부하면서. 누구보다 이 분야에 정통하고자 계속해서 정교해자고 노력하며. 이 세상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살아가건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으니, 그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에 집중하며 살아가자고. 이제 다시는 직업을 바꿔가며 비효율적인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아쉬워하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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