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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Jan 10. 2024

가능한, 한번 해 봐요

   “가능한!”

   오래전 김종민 씨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웃음을 선사해 주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그 장면을 보며 웃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장면이란 바로, 가능한 대추를 빨간색으로 놓으라고 말하며 한번 따라 해보라는 한 어머님의 말에 김종민 씨가 대추 놓는 방식이 아닌 그 말투를 따라 ‘가능한!’을 외친 장면이었다.




   임용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실력도 운도 아닌 TO라고 할 수 있다. TO란 Table of Organization의 약자로 보통은 정원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뽑는 인원’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데, 매년 들쭉날쭉한 TO야 말로 임용 준비생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주된 원인이 되시겠다. 정부의 정책이나 학령인구의 변화에 따라 많게는 수십 명, 적게는 한두 명을 뽑거나 아예 뽑지 않는 경우까지 있다. 그렇다 보니 실제로 TO가 발표 난 후에 공부를 접거나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경우도 있고, TO를 보고 나서야 임용판에 뛰어드는 경우도 많다.


   수험생들의 고민을 더하는 점은 바로 이 TO가 지역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각 시도 교육청마다 시행 공고 및 TO가 발표되는데 응시 예정이었던 지역의 TO가 거의 없다면 다른 지역으로 응시할 수밖에 없다. TO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아도 문제인데, 이 경우엔 다른 지역 응시 예정자들까지 몰리기 때문에 경쟁률이 치열해진다. 시험이 끝난 후 똑같은 점수를 받더라도 어느 지역에서는 합격, 또 다른 지역에서는 불합격일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험은 접수 전부터 전쟁을 방불케 하는 눈치싸움을 낳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립학교 TO 또한 중요했다. 2020년도를 전후로 각 시도 교육청에서는 공립과 사립학교 동시지원 제도를 도입했다. 시도 내에 있는 사립학교에서 특정과목의 교사를 뽑겠다고 교육청에 위탁한 경우에 수험생은 해당 사립학교에도 지원이 가능했다. 다만 지망하는 순위를 정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1 지망을 공립으로 2 지망을 사립으로 지원하는 편이었다. 사립학교는 이동이 거의 없고, 고등학교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침내 임용 시험 계획 공고가 올라온 날, 역사 TO를 보며 나도 김종민 씨를 따라 외쳤다.

   “아, 가넝한!”

   올해 전체적인 TO는 나쁘지 않았다. 내가 응시하려는 지역에서 역사 교사를 뽑는 숫자는 20명, 사립학교 TO도 있었기 때문에 이걸 합친다면 총 21명이 됐다. 앞으로 학생 숫자가 계속해서 감소하기 때문에 TO 자체도 많이 줄어들 거라는 전망이 많았던 것에 비하면 꽤 괜찮은 TO에 속했다. 게다가 1차에서는 최종 선발 인원의 1.5 배수를 뽑는다는 걸 감안하면 1차 필기에서 31등 안에만 들면 일단 2차까지 도전해 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사전 TO 공고를 통해 이미 대략적으로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좋은 TO가 나온 걸 보니 올해 합격을 노려보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만약 올해 붙는다면…’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가슴속에 작은 불씨가 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돈을 벌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나름의 역할을 수행해 내고, 나름의 직업의식을 가지고 내 일에 헌신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노트북을 덮고 글자를 보려 애썼지만, 합격한 후에 펼쳐질 미래가 눈앞에 어른거려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변덕이 심한 건 수험생의 대표적인 증상이므로 오후가 되어서는 불안한 마음이 커졌다. 10:1의 경쟁률만 적용한다고 해도 21명 안에 들기 위해서는 내 뒤에 180명을 제쳐야 한다는 의미였다. 겨우 5개월 남짓 준비한 내가 그럴 수 있을까.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러자 책상 반대편에 앉은 희망을 죽상을 하는 것이 보였다. 지나온 과거가 나를 향해 비웃음 짓는 것이 보였다. 나는 뭘 포기하고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걸까.




   분명 임용 준비 전만 하더라도 ‘3년 안에 합격’을 목표로 했었지만 3년이나 공부를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해 보였다. 이렇게 힘든 날들을 앞으로 몇 년이나, 아니 다만 몇 달이라도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머지않아 체력에서 무너질 테고, 그리고 나면 정신이 무너지는 건 순간일 것이 뻔했다. 안타깝게도 그런 실패를 허락할 만큼 내 인생은 여유롭지 않았다.


   되든 안 되든, 일단 ‘올해 합격’으로 목표를 수정하기로 했다. 그게 ‘내년 합격’보다는 더욱 그럴듯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들렸다.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지만, 사실 세상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물불 안 가리고 덤빈다면 기회는 주어지는 것이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누가 더 오래 공부했냐의 싸움이 아니라 누가 더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지식을 숙지했느냐의 싸움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빠른 속도로 머릿속을 정리하고 채워 나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시험까지 한 달 여의 시간이 남은 시기. 가능한, 한번 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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