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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Dec 20. 2023

77일과 76일 사이 3/4 승강장

   “뭐 하고 지내?”

   대학 시절 잠깐 친하게 지냈던 동기가 물어왔다.

   “어, 나? 얼마 전에 회사 그만두고 공부하고 있어. 임용고시 보려고.”

   나는 동기의 눈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한 채, 눈을 여러 번 깜빡거리며 답했다.

   “아…… 진짜?”

   ‘아’와 ‘진짜’ 사이의 공백은 얼마나 길었나.

   “맞다, 이번에 현지 언니 결혼하는 거 들었어?”


   화면이 바뀌고 결혼식 장이 들어섰다. 이름만 알고 몇 번 대화해 본 적은 없는 현지라는 동기 언니가 부케를 던졌고, 나와 대화를 나누던 동기는 성큼성큼 걸어가 그 부케를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신랑과 신부 사이에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었고, 그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핸드폰 불빛을 비춰 좋은 날은 눈부시게 밝히고 있었다. 그 사람들 속에는 얼굴만 아는 동기들, 같이 팀플을 했던 선후배들, 한 때 친했던 친구들까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화면을 가득 메웠다.




   눈을 뜨자마자 속이 잔뜩 상해 침대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 동기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들끼리 행복한 모습이었다. 한참을 떠들썩하게 웃고 난 후에는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자기들만 아는 대화를 나눴다. 누구의 근황, 최근 학교의 이슈, 어느 교수님의 소식 같은. 그 앞에서 나는 왠지 초라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누가 봤다면 저 보릿자루는 왜 꿔다 놓았느냐고 핀잔을 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말이야, 나는, 딱히 뒤에 이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시험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힘든 건 어쩌면 그런 것들이었다. 이제는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시시각각으로 떠오르는 것. 고요한 시간 속에 덩그러니 앉아 있다 보면 이곳이 흡사 사람들이 말하는 시간과 정신의 방인가, 싶은 생각이 들며 눈동자 뒤편에서 까마득한 기억을 꺼내 왔다. 추억이라고 보기 애매한 기억들. 기어코 늦은 밤 이불을 걷어차게 만드는 기억들. 공부를 하다가도 불현듯 이마를 탁 치게 만든다. 


   ‘아, 그때 그렇게 말할걸. 그 말은 대체 왜 했지? 너무 어리숙하게 행동했었어. 그러지 말걸’

   좀 많이 바보처럼 굴었던 순간들을 최대한 미화하려고 노력하며 사는데도, 그런 순간들이 떠오르면 어김없이 나를 한 대 줘 패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체 내가 나를 싫어하면 대체 누가 나를 좋아해 줄까.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마음이란 게 참 쉽게도 무너져 내렸다.




   오늘은 공부를 시작한 지 77일째, 시험까지는 76일이 남은 날이었다. 반환점을 도는 날. 느지막이 침대에서 겨우 빠져나온 후 멍하니 양치를 하며 결심했다. 오늘, 공부를 시작한 이래 두 번째 휴일을 가지기로. 반환점이니만큼 그동안의 모습을 점검해 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정해보기로. 하루 정도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사실 그동안 제대로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던 날이 여럿 있었다. 공부의 효율성을 고려했다면 아마 쉬는 게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쉬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공부 안 한다고 해서 딱히 할 게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공부 말고는 특별히 재미있거나, 관심이 가는 게 없었다. 이 흑백 세상 속에서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건 공부, 오로지 공부뿐이라는 걸 절감했기 때문이었을까.




   하루를 뭘로 채울까 고민하다가 커피를 타고 아이스크림을 꺼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영화 사이트에 들어가 나열된 온갖 영화들을 살펴보고 있으니 <나는 부정한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눈에 띄었다. 영화 사이트에서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라고 추천해 주었는데, 마침 주연 배우가 어릴 때부터 너무도 좋아한 레이첼 와이즈였다. 어린 시절 영화 <미이라>를 통해 알게 된 후부터 줄곧 얼마나 동경했던지.


   영화는 ‘홀로코스트는 없었다’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공격하는 한 학자에 맞서 주인공이 반박하며 시작한다. 역사학자인 주인공이 홀로코스트가 분명히 존재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변호인단을 꾸려 재판을 진행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불현듯 손끝에 잡힌 영화가 하필이면 역사학자에 관한 것이라니, 그게 참 운명 같았다. 


   영화를 보며 마음에 깊이 남았던 건 역사학자와 변호사들이 가지는 직업의식과 일종의 사명감이었다. 나는 살아가면서, 오랜 기간 동안 반드시 일을 해야 하는 입장으로서, 그렇다면 고고하게, 일종의 직업의식을 갖고 일에 종사하고 헌신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일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해 평생을 연구하고 몸 바쳐 애쓰고 싶다고.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노트북을 덮지 않고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직업의식을 갖고 살아가고 싶다는 말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로 치부당한다 하더라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하물며 그것이 아무리 개똥 같은 철학이라도 나만의 철학이므로 마음 깊이 새기며. 다가올 내일, 다시 열심히 달려보자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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