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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리 Dec 13. 2023

뭘 잘했다고 울어

   ‘제임스, 찰스, 찰스, 제임스…’

   영국의 명예혁명에 관한 강의를 듣다 말고 조용히 책을 덮었다. 멀리 시선을 던지고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시간적 여유도 없는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괜히 감상에 젖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절망스러웠다. 정말 이렇게 기본적인 내용조차 무지하다는 사실이. 어쩌자고 학교 다닐 때 이 정도의 공부도 하지 않았는지. 공부할 게 너무 많았다. 너무 감당이 되지 않게 많았다. 




   “야, 너는 역사 전공을 해.”

   TV 속 여느 퀴즈 프로그램에서 우리나라 역사에 관련된 문제만 나오면 족족 맞히는 나를 보고 누군가 말했다. 

   “아, 진짜 그럴까?”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말하고 속으로는 안 그래도 그럴 건데, 하고 생각했다. 그때 당시 나의 관심사는 오직 국사였으니까. 선사시대부터 고조선을 거쳐 현대 정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세기 별로 쪼개 외우는 게 특기였고 우리나라 각종 문화재를 보호하고 복원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어차피 있던 꿈도 버리던 날들이었으니 새로운 꿈 하나 줍는 게 어렵지 않았다. 


   사실 그런 내가 역사를 정말 좋아했냐 하면 그건 아니었고, 역사를 가르쳐 주던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것도 모니터 속의 선생님을. 대학에 가기 위해 클릭한 인터넷 강의의 선생님을 보고 반했고, 충실히 그 선생님의 강의 커리큘럼을 탔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사랑보다는 존경에 가까웠고 좀 더 정확하게는 나 역시 그의 모습과 같이 되고 싶다는 감정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계기가 너무 사소했을까, 그때까지도 좋아했던 건 그 선생님이 알려준 역사 내용에 한정됐다. 국사와 근현대사.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 그랬으니 우리나라 역사 이외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전공자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상식을 갖추지 못해 웬만한 사람들 보다 더 못하는 수준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했다. 그런 내가 누군가에게 역사를 가르치겠다고? 내가 한 선택의 무게가 한층 더 무겁게 느껴졌다.


   사실 역사적 사실 말고도 공부해야 하는 건 많았다. 가장 복병이었던 건 역사교육론이었다. 일단 논문으로 이루어진 교육론의 책을 소화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는데, 심한 경우 내용에 집중이 되지 않아 글의 문장을 놓치기를 수십 번을 반복해야 한 장을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실전 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데생을 가르쳐주고 수채화를 그리라는 느낌이 이와 비슷할까. 


   전공 외에 교육학도 성가셨다. 현장에서 적용 가능할까 싶은 수백 개의 이론을 외우고 또 외워야 했다. 그 이론의 배경이나 깊이를 미처 다 헤아리기도 전에 무조건 외우기를 반복. 외워도, 외워도, 또 외워야 할 건 생겼다. 다른 걸 외우는 사이 이미 외운 걸 까먹길 수백 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지식을 쏟아부었다. 계속해서 독 밑으로 지식이 빠져나가면, 그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빠른 시간 안에 부어서 독을 채워야 했다. 처절한 시간 싸움이었다. 




   다시 조용히 책을 폈다. 명예혁명으로 돌아와 제임스와 찰스 1, 2세의 내용을 비교하고 머릿속에 새기기 위해 노력했다. 너희들은 사라지지 말아 주라. 내 몸 밑으로 빠져나가지 말아 주라. 그리고 다시 강의를 틀어 남은 부분을 마저 듣기 시작했다. 남은 강의는 길지 않았다.


   “너무 급하게 굴지 말고, 초조해하지 마세요. 그러면 사람은 실수를 하게 돼요. 지금처럼만 차근차근히 주어진 일들을 하다 보면, 어느새 결승선에 도달해 있을 거예요.”

   선생님은 강의를 마칠 무렵에 학생들을 독려하기 위해 그런 말씀을 꺼내셨다. 참 희한한 일이지만 모니터 안에서 나를 향해하는 게 아닌 말을 듣는 것도 위로가 됐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억하기로 했다. 과거의 내가 이 모든 일을 다 상상했고, 예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다 감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길을 선택했다는 걸. 올해가 아니더라도 나는 내게 3번의 기회를 줄 거라는 사실도 상기했다. 조급할 이유는 없다. 나는 묵묵하게 내가 선택한 길에 최선을 다 하기만 하면 됐다.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펜을 잡았다. 아직 하루는 많이 남았으니, 다시 충실하게 공부로 이 시간을 채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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