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을 걷어보니 문득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어어, 어서 와, 이미 가을인데, 몰랐지? 그런 눈빛으로 거리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에어컨이 마땅치 않아 더위로 고생한 게 엊그제 같은데 밖은 벌써 찬바람이 불고 나무는 온통 형형색색의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완연한 가을을 통과하고 있었다. 아, 나는 가만히 앉아 과거 속 시간을 들여다보느라 바빴는데, 현실의 시간은 여전히 자비도 없이 흘러가 있었구나. 괜히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주방으로 나가 커피를 인스턴트 탔다. 커피 가루를 컵 바닥이 채워지도록 붓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공기 중에 커피 향과 따뜻한 수증기가 퍼졌다. 컵을 양손으로 감싸며 창밖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이다. 합격하는 순간을 상상하고, 또 간절하게 기도하기를. 틈만 나면 두 손을 꼭 모아서 어느 쪽에 있는 지도 모를 신에게 구걸한다. 저는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다 하고 있으니까 제게도 한 번만 운을 주세요.
그리고 또 수십 번이다. 떨어져도 괜찮을 수 있게 정신을 단단히 잡아 둬야지, 미리 그 아픔에, 슬픔에 적응해 둬야지, 다짐하기를. ‘불합격’을 확인하는 순간 세상이 아득해져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도록, 미리 마음 단단히 먹어 둬야지. 그런데 이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라서, 연습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나는 그 허탈함과 허무함을 넘어서는 절망감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시험까지 약 2주 정도의 시간을 남겨두고 문득, 모든 것이 서둘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끝맺음 짓기도 전에 모든 것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끝나고 나서 맞이할 결과가 두려웠다. 불안할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불안해한다는 시기, 아마 모두가 나처럼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매일 밤 오지 않는 잠과 한참을 싸우다 잠이 들겠지. 다들 그렇겠지.
잠이 쉽게 오지 않는 밤에는 지나간 날들을 떠올렸다. 작은 방 안에서 연인과 단 둘이 붙어 앉아 우습거나 감동적인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맥주를 홀짝이던 날들. TV 속 멋진 풍경과 아름다운 노랫가락을 들으면서 괜히 코 끝이 찡해졌던 날들. 그날들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온기를 떠올리고 그리워했다. 별 거 없이도 잘 웃던 날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도 크게 반응하고, 깊게 생각하고, 그러다가 또 다른 자극에 주의를 빼앗기길 바쁘게 반복하던 날들. 그런 일상적인 날들을 그리워했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다른 선택지가 내게 존재했었을까? 내가 현실에 만족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그곳에서도 매달 곱게도 나오는 월급이나 차곡차곡 모으고 주식으로 돈을 불리고, 매일 출근할 수 있는 회사가 있음에 감사하고, 그러면서도 쉬는 날에는 여기저기 혼자서 잘도 쏘다니면서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면 내게는 그곳에서 남겠다는 선택지를 가질 수 있었을까. 아, 나는 누구에게 자꾸만 무얼 묻는 걸까.
그때 만약, 이걸 다 감당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더라면. 1년이든, 2년이든 아니 4년이 걸리더라도 선생님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쯤 그 따뜻한 날들 속에서 생각 없이 웃고 있을 수 있었을까. 연인과의 얼마 남지 않은 정을 붙잡고 안정감에 안주할 수 있었다면, 저 멀리 창문 너머 펼쳐지고 있을 미래를 기대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또 어디로 어떻게 놀러 갈까, 그런 계획을 짜고 있을 수 있었을까. 그가 운전하고 난 옆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젊은 날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을까.
백 번을 내게 물어도 아니라는 대답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도 행복할 수 없었고, 지금도 이렇게 두렵고 무섭기만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오지 않을 날들의 행복을 기다리는 처지일까 두려웠다. 이러다가 영영 선생님도 못 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도 못할까 봐. 만약 올해 안 된다면 내년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공부해야 하지. 일을 병행해야 하나? 내후년에도 안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나?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할까?
자꾸만 불안해지는 마음에 뒤돌아보고 후회하는 내가 미웠다.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어서 이 매분 매초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은 시간들이 흘러가기를. 어서 모든 일이 다 정리되고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웃으며 견디기엔 너무 가혹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