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봄이었다

bgm : 초승 - 바다

by 민서


나는 ENTJ이다. 어느 날, ENTJ의 이상형이라고 적혀 있는 SNS 게시물을 보게 됐다. 나도 나를 잘 모를 때가 많은데, MBTI를 만든 사람은 이미 나를 간파한 게 분명하다. 내 이상형은 내가 먼저 다가갈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 내게 어설픈 플러팅(Flirting)은 의미도 없고, 오히려 역효과만 날 수 있다. 또, 불호가 강하고 밀당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적으로 내게 존중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퍼주는 건 좋지만, 너무 심한 경우 부담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하하. 눈치챘는가? 연애할 마음이 없다는 소리이다. 설명에 무성애자가 많다고도 하더라. 그렇다. 나는 살아 움직이는 얼음이었다. 얼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게다가, 번호를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자랑할 거리가 하나는 있다)


불과 몇 년 전, 내 이상형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련이 찾아와도, 같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을 찾다 보니, 동갑보단 연상 쪽으로 눈이 갔다. 역시 한두 살 많은 게 다르긴 다른가 보다…. 는 개뿔. 깨어나 보니 어항이었다. 분명히 투명한 바다였는데, 아무리 헤엄쳐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제자리였다. 어항을 깨버리고 싶었지만, 그냥 조용히 폴짝 뛰어올라 내려왔다. 하. 내리쬐는 햇볕이 이렇게 따가울 줄이야. 살갗이 아팠다. 의지하고 싶어, 고민이든 마음이든 다 내려 보여주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힘들었겠다’, ‘괜찮아’. 공감의 가면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달콤한 떡밥을 꿀떡 삼켜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만든 내 비늘이었던가. 반짝반짝 윤이 나는 비늘이기에, 어떤 공격에도 강할 줄 알았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어항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뒤, 다시 바다로 헤엄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른쪽. 왼쪽. 방향을 틀고 시선을 돌릴 때마다 멈추게 된다. 한번 갇혔던 물고기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잘 모른다. 온몸을 떨며 간신히 그 자리에 머물 뿐이다. 그물에 낚여 또다시 어항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작은 발버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헤엄이라기보단. 음. 그냥 떠 있는 거지. 아가미가 없이 바닷속에 갇힌 느낌이랄까. 물에 잠긴 귀와 눈은 먹먹해져 쓸데없는 소리와 감정을 차단한다. 나쁘진 않았다. 고요하고 조용한 느낌.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난 꽤 오랫동안 잠수 중이었다. 혼자 헤엄치는 방법을 익힐 때까지. 어느새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나는 혼자인 것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연애는 무슨 연애. 혼자 있는 삶이 너무 편안하고 좋았다. 나만의 루틴. 나만의 방식. 나만의 휴식. 모든 게 다 ‘나’를 위한 것들이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행복하고 소중해서 누가 들어오는 게 싫었다.


그때, 웅-. 웅-. 고요한 바닷속에서 작은 물결이 느껴졌다. 저 멀리 물고기 하나가 헤엄치고 있었다. 신경이 쓰였다. 그의 행동이, 그의 생각이 나와 너무 닮아서.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어느새 나는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덜컥. 또 나는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걸 너무 쉽게 가져버리고 말았다. 가려는 마음을 멈추려 몇 번을 뒤돌았는지 모른다. 내 마음인데,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말이 되나. 에라이. 모르겠다. 내 마음이 향하는 데로 가자. 나는 그냥 내 마음을 따라가기로 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허허. 그런데 이게 웬걸.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있을 확률이... 몇 프로라고 했더라. 아무튼 그 적은 확률이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나는 커플이 되었다. 커플. 커플이라니…. 단어부터 너무 생소하고 어색했다. 갑자기 너무 잘 되니 그가 수상하기도 하고. 괜히 이곳이 어항은 아닐까 싶어 재빨리 헤엄쳐보기도 했다. 그는 그런 나를 묵묵히 기다려줬다. 흐지부지 끝났던 이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는 내게 확신을 주는 사람이었다. 상처라는 게, 참 신기하다. 사람 때문에 받은 건데도. 사람 덕분에 치유하게 된다.


그렇게 내 바닷속에도 봄이 찾아왔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흩날리는 벚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곤 했었다. 저렇게 활짝 피면 금방 지고 말 텐데. 저들은 자신이 금방 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내가 벚꽃이라면 어차피 져버릴 거. 온 힘을 다해 피어나려 하지 않을 텐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은 자꾸 무모한 마음이 생긴다. 언제 질지 그리고 언제 다시 필지 모르지만, 한껏 만개하는 벚꽃처럼. 나도 만개해 볼까. 하는 그런 무모한 마음. 그런 마음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늦은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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