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추락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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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

뭐랄까. 뜨거운 여름날 녹아내려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고 마는 아이스크림의 죽음을 목격한 것 같다. 원치 않는 추락이었을 게다. 그러게 왜 녹아 버린 거니. 잘 붙들고 있었어야지. 하긴 네 잘못은 아닌 것 같아. 그럼 뜨거운 여름 탓일까. 부주의한 주인의 탓일까. 잘잘못을 따지고 있는 사이에, 아이스크림은 태초의 모습이었던 그 민낯으로 돌아간다…. 돌아갔다. 이게 다 여름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뜨거운 여름 때문이다. 나는 그 죽음의 목격자다. 피해자는 하얀 소프트아이스크림. 너무 하얘서 더 금방 더러워지는. 그런 하얗고 순수한 소프트아이스크림. 어디로 추락할지 몰라 힘겹게 손끝에 매달린 모습이 안쓰럽더라. 해소되지 못한 마음이 녹아내려 또다시 추락한다. 다시 얼어붙을 수도 없는 바닥으로.


‘툭... 투둑-’


나는 감정을 인식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감정을 판단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지며, 어떤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분석한다. 분석이 끝나면 상황을 해결하고 감정을 다스리려고 한다. 근데 그 객관적인 분석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내 바운더리(boundary) 안에 있는 이들. 내 바운더리는 아주 좁고 깊다. 나만의 기준이 명확해서 들어오기도 힘들뿐더러, 들어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한번 들어오고 나면, 말 그대로 내 인생의 ‘최애’가 된다. 덕질을 한다고 해야 하나...? 여하간 덕질이랑 비슷한 개념이라고 해두자. 내 바운더리 속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감정 판단이 너무 어렵다. 괜한 오해로 감정을 판단해, 관계가 깨져버리는 건 아닐까. 내가 준 만큼 받기를 원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들면 어떡하나. 깊은 고민의 수렁에 빠져버리고 만다. 난 그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조그마한 흠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가공되지 않은 내 민낯의 감정을 내비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중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서운함’. 화를 내기도 말을 하기도 애매한 서운함이 있다. 이 감정은 아무에게나 드는 것이 아니다. 바운더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만 드는 희귀한 감정이다. 그래서 서운하다는 감정을 빠르게 관찰해 파악하기가 어렵다. 거기에 사랑이라는 배경이 깔리게 되면, 이건 수습 불가다. 파악이고 나발이고 속상하기만 하다. 밉다가도 보고 싶고, 싫다가도 좋아지는. 허, 참 이런 역설도 없다. 이렇게 되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양가감정이 존재하게 된다.


‘삐릭-’ 이번에도 분석 실패다.


말을 해야 할까. 하지 말까. 괜히 말했다가 싸우면 어떡해. 그래도 말을 해야 알지. 복잡한 내 모습이 그의 시선에 닿았다. 달라진 나의 말투와 행동에 기분이 상할 만도 한데. 그는 차분히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 말하고 싶을 때 천천히 말해달라고. 그렇게 말했다. 스르륵. 서운함 옆자리에 한 송이의 꽃이 피었다. 서두르려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위안이 되었다. 3일 뒤, 나는 눈을 꽉 감고 용기를 내서 말을 뱉었다. 맙소사. 말의 마침표를 찍어갈 때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 어라? 제법 영화에서 나올 법한 결말에 조금은 흠칫 놀랐다. 그날 이후, 우린 더 가까워졌다. 말하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마치 더운 여름날, 샤워를 끝내고 선풍기 앞에서 수박을 먹는 기분이랄까. 시원하고 달콤한…그런 기분.


아이스크림 추락 사고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이스크림은 원래 녹는다. 더운 여름이 아니더라도. 밖에 놔두면 알아서 녹는다. 아이스크림은 액체 상태를 그대로 얼린 것이 아니던가. 액체가 흐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저 각박한 추위 속에 잠시 얼려져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녹는 건 나쁜 게 아니다. 얼기 위해선 녹은 과정도 필요한 법이다. 이제는 녹은 마음을 모른 체하지 말아야겠다. 이게 다 여름 덕분이다. 마음이 더 빠르게 달궈져 버릴 만큼 뜨거운 여름 덕분이다.


(PS. 어어…. 흐른다 흘러. 할짝할짝. 서운함이 흐를 때는 얼른 핥아먹고 말을 꺼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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