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에 한참 늦어버렸다.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고. 지하철을 타려는데 사람이 너무 많다. 핸드폰은 또 어디로 갔는지. 미치겠다. 어쩌지!!!
"오빠 일어나! 산책하러 가야지."
아내가 꿈속의 나를 깨운다. 10시다. 피곤한 날이면 흔히 꾸는 패턴의 꿈. 어제 프리미어리그를 보다가 새벽 두 시쯤 잠이 들었다. 망할 놈의 시차. 체력이 떨어져서인지 한시부터는 졸아버렸다. 곧 새벽축구를 보지 못하는 날이 올 거라는 생각에 슬프다. 벌써 운동복을 챙겨 입는 아내가 보인다. 나는 얼른 이불 밖으로 빠져나간다.
초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우리는 아침 산책을 간다. 강릉에 살게 되면서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는 경포호 산책이다. 경포호는 넓은 수면 위로 예쁜 하늘이 묻어나고 때마다 다른 철새가 헤엄 친다. 고요한 가운데 물소리, 새소리가 편안함을 준다. 우리 앞에 나란히 걷고 있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보기 좋다. 맞은편에서 뛰어오는 사람에게서 활기가 느껴진다. 딱 하나, 언젠가부터 호수 밖에서 대여해 주고 있는 4인 자전거는 정말 싫다.
우리는 40분을 걷는다. 호수 주차장에서 허균허난설한 생가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코스. 가볍게 걸으며 호수를 구경하고 소나무숲을 만끽한다. 운동은 아니고 산책이다. 여전히 나오는 길이 귀찮지만, 막상 오고 나면 후회 없이 너무 좋다.
"커피 한잔하고 가자."
우리는 산책을 끝내고 사천해변으로 향했다. 약간의 루틴이랄까. 산책 후 마시는 커피는 더 맛있다. 사천해변은 경포호에서 차로 조금만 이동하면 갈 수 있다. 가까운 경포해변을 두고 굳이 사천해변까지 가는 건 카페 오버더레인보우 때문. 이곳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이장우 화가의 그림들이 걸려있다. 평일은 사람이 적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2층 창 밖으로 사천해변이 가까이 보인다. 친절한 사장님이 우리를 반겨주신다.
"와. 오늘은 사람이 많네."
"테이크아웃 하자."
일요일 아침. 관광객들이 숙소를 빠져나올 시간이어서 일까. 카페 안이 다양한 사람으로 가득하다. 주말은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았을까. 아쉽지만 얼른 이곳을 떠나야겠다. 목이 아픈 아내는 생강이 든 대추차를 나는 따뜻한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공간을 압도하는 그림들로 가득한 카페인데, 사람들의 시끄러움은 그림을 압도했다. 화가의 그림은 배경으로 아웃포커싱 되어 껍데기뿐인 대화에 희석되고 있었다.
내 카페도 내 그림도 아닌데. 좋아하는 공간에 가득한 손님들에 대한 질투를 한다. 나의 무표정한 얼굴 너머 음흉한 생각도 모른 체 하나 같이 즐거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실 카페 와서 커피 마시고 대화하는 손님들이 무슨 잘못이냐. 너나 마음을 곱게 쓰자. 사장님을 위해선 이렇게 손님이 많아야 한다. 노력하신 대가를 받으셔야지. 그냥 우리가 평일에 오자.
"커피랑 대추차 나왔습니다. 오늘 데이트 나오셨나 봐요?"
"하하. 산책 나왔어요."
아무도 모를 긴 잡상이 이어지는 중에, 사장님의 미소와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사장님은 내게 바람직한 남편상이라는 칭찬을 건넨다. 아내는 이해 못 할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늘 함께 다니는 우리 모습에 사장님만의 상상과 오해가 있으시겠지. 나는 멋쩍게 웃어 보이고 서둘러 카페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