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예! 미숫가루!"
고향집에서 갑자기 택배 두 상자가 왔다. 사과, 들깻가루, 참기름.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미숫가루까지 들어있다.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미숫가루는 늘 맛있다. 방앗간을 보기 힘든 요즘, 입에 맞고 가격도 저렴한 미숫가루는 구하기 쉽지 않아 더 감사하다.
"냉동고 정리 좀 해야겠어."
들깨가루를 덜어 냉동고에 보관하려고 보니 자리가 없다. 870L 냉장고의 냉동실이 가득 찼지만 먹을 건 없다. 아내는 이참에 냉동고 정리를 결심했다. 이제껏 냉동된 음식물은 버리는 게 맞다. 꺼내고 또 꺼내도 또 나온다. 차가운 냉동고 속에서 꽁꽁 얼어있던 감사와 충동이, 밖으로 나와 죄송과 후회로 녹아내리고 있다.
"와... 18kg 나왔어."
십팔 킬로그램. 음식물에서 이제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들의 무게.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온 사이 아내는 반찬통과 주변정리를 하고 있었다. 텅 빈 냉동고를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가만 보면 오롯이 냉동고의 주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구나. 늘 부모님이 보내주셨거나 누군가 선물한 각종 재료와 음식물로 가득했다. 냉동고의 지분 대부분은 타자의 것이었다.
"이 칸은 평양냉면, 여긴 만두, 아래는 아이스크림..."
아내는 새로운 냉동고 운용 계획을 발표했다. 폭격 맞은 폐허에서 희망의 싹을 틔우는 여자. 멋있구나. 그래, 이제 냉동고의 진짜 주인이 되어보자. 조만간 부모님께 감사와 사양의 전화를 돌리자. 쪼그려 앉아 용을 썼더니 허리가 아프다. 미숫가루 한 컵 먹고 쉬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