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따라 쓰는 힘

필사의 힘

by 민쌤


글자를 따라 쓰는 힘

_필사의 힘




필사를 시작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단지 ‘쓰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책을 따라 써 내려가는 일은 마치 운동을 시작할 때의 첫 마음가짐과 비슷했다. 성취감이 있었고, 무엇이라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하루에 몇 줄, 몇 장씩 쓰다 보니 어느새 노트 한 권이 꽉 차 있었다. 그 순간은 기뻤지만, 이상하게도 기쁨보다 “오늘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커졌다.


의무로 바뀐 마음은 금방 피로를 불러왔다. 손목은 뻐근해지고, 반복되는 글씨는 지루해졌다. ‘계속해야 하는데.’라는 마음과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마음이 부딪힐 때쯤, 나는 필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글을 베껴 쓰는 이 행위가 정말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나는 이토록 꾸역꾸역 쓰고 있는가? 그 질문들 사이에서 나는 새로운 방식을 찾게 되었다. 그 방식이 바로 읽고, 말하고, 쓰는 필사였다.


처음에는 글자를 눈으로만 보고 손으로만 따라 썼다면, 이번에는 글자 하나를 쓰기 전에 먼저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 소리가 내 귀에 닿는 순간, 그 문장이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다. 오히려 한 문장을 쓰는 데 시간이 더 걸렸고, 집중력은 더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노력만큼, 그 문장은 내 안에 더 깊이 남았다.


이 방식은 단순한 필사가 아니었다. 머리로만 이해했던 문장이 소리로 나오고, 그 소리가 내 귀를 지나 마음으로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손끝을 통해 종이에 새겨졌다. 마치 문장과 내가 한 번 더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예전의 필사가 겉을 스치는 기록이었다면, 이 방식은 속으로 들어오는 체험에 가까웠다.


물론 필사라고 해서 모든 문장을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문장은 다시 정리해야 하고, 나만의 생각을 적는 과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소리 내어 쓰는 필사는 확실히 글을 더 오래 남게 했고, 그 문장을 나의 말로 바꾸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읽고, 내가 들은 문장은 결국 나의 언어가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필사를 하며 나는 깨달았다. 글을 적는 일은 단순히 손의 움직임이 아니라, 마음을 단단하게 훈련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정신없이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은 생각을 붙잡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선물해 준다. 글씨를 따라 쓰는 과정은 느리고, 번거롭고, 때로는 지겨울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느림 속에 내가 놓치고 살아가던 감정과 사유가 천천히 되살아난다. 누군가에게는 필사가 단조로운 작업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훈련이 되었다.




“배움은 머리가 아니라, 반복을 견디는 몸에서 자란다.”

_미상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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