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수레가 요란하다
나는 죽을 때까지 지적이고 싶다.
_양원근
양원근 작가님의 책 중에서
<빈 수레가 요란하다>에 대하여
말이 많은 사람은 가볍고, 조용한 사람은 깊을 거라는 믿음 속에서 나는 꽤 오래 살아왔다. 어른들이 말해주던 속담은 늘 옳은 말처럼 들렸고, 그 말에 기대어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아끼는 사람이 되었다. 드러내지 않는 것이 지적인 태도라고, 침묵 속에 머무는 것이 더 단단한 선택이라고 믿으면서.
그래서일까. 무언가를 알고 있어도 쉽게 말하지 않았고, 생각이 있어도 꺼내기보다는 안에 쌓아두는 쪽을 택했다. 혹시라도 요란해 보일까 봐, 혹시라도 가벼워 보일까 봐 스스로를 자주 눌러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이 마음에 걸렸다. 그럼 찬 수레는 정말 조용하기만 할까.
책은 그 질문을 대신 던져주었다. 정답을 내놓지 않은 채, 우리가 너무 쉽게 믿어온 판단을 살짝 옆으로 밀어놓는 방식으로. 그 질문 하나로, 나는 내가 당연하게 여겨온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깊이 고민한 사람일수록 어느 순간은 말하고 싶어진다. 생각이 충분히 익고 나면 그걸 혼자만 간직하기엔 아까워지는 순간이 온다. 그 말은 과시가 아니라 확신이라기보다 오히려 질문에 가깝다.
“이 생각이 맞는지 같이 흔들어보고 싶어서.”
“혹시 내가 놓친 건 없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게 입을 여는 순간이 있다. 그 소리는 요란함이라기보다 사유가 움직일 때 나는 진동에 가깝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이 밖으로 나와 공기를 만나며 생기는 떨림 같은 것.
그래서 문제는 소리의 크기가 아니었다. 문제는 왜 그 소리를 내느냐였다. 알지 않으면서 아는 척하려는 소음인지, 알았다고 생각한 것을 다시 의심해 보기 위한 울림인지.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그 두 소리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종종 조용함을 과대평가한다. 말이 없으면 깊을 거라 믿고, 드러내지 않으면 지적일 거라 착각한다. 하지만 조용함은 지성의 증거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성향일 뿐이다. 침묵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유가 깊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을 아낀다고 해서 언제나 단단해지는 것도 아니다.
진짜 지성은 필요할 때 말할 줄 알고, 틀릴 수 있음을 감수하며, 자기 생각을 세상 앞에 올려놓을 용기를 가진 태도에서 드러난다. 완벽하지 않아도, 비난받을 수 있어도, 다시 흔들릴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태도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말하는 나 자신을 너무 빨리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모임을 만들고, 글을 쓰고, 생각을 나누는 일이 혹시 가벼워 보일까 봐 괜히 한 발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 드러내는 행위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드러낸다고 비어 있는 건 아니고, 말한다고 얕아지는 것도 아니다. 찬 수레에도 소리는 난다. 그 소리는 자랑이 아니라 스스로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흔들림이다. 나는 이제 그 흔들림을 성급히 숨기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그 떨림 속에서 내 생각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확인해보려 한다.
조용함이 미덕이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사유가 움직이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싶다. 그 소리가 크든 작든, 그 안에 담긴 무게를 스스로 믿어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