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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Apr 19. 2023

멋진 삶이란

나는 어떤 삶을 꿈꾸었을까



그때 내 나이 벌써 아홉 살 쯤이었는데, 그 나이면 행복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색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법이다. 뭐 누구를 모욕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로자 아줌마의 집은 아무리 익숙해진다 해도 역시 우울한 곳이었다. 그래서 쉬페르가 감정적으로 내게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자, 나는 녀석에게 멋진 삶을 선물해주고 싶어졌다. 가능하다면 나 자신이 살고 싶었던 그런 삶을. -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2013, p.29






내 나이 열일곱 살 즈음이었.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신길동 주택가 연립에 살았다. 그 집은 버스정류장에서 50미터쯤 되는 골목을 걸어 올라가면 우측, 좌측, 다시 우측 골목으로 꺾어져 U턴으로 회전해 나오는 골목 끝에 자리했다. 2층짜리 단독 건물에 여섯 가구가 살았는데, 앞마당에 자가용 네 대 정도는 세울 정도의 공간을 두고 담벼락을 두른 집이었다. 차는 담장 밖 골목에 세웠으니, 자그마한 텃밭을 가꾸고, 수도가 연결된 마당에서 김장 함께 담그 웃음소리 나는 소박한 공동주택이었다. 


방세칸짜리 자가 연립에 우리 식구들은 모두 흡족해했다.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서울로 올라와 내 집마련에 성공부모님이 자랑스러웠다. 부모님은 연립으로 이사오기까지 6년이 걸렸다. 농사일을 할머니에게 맡기 부모님만 먼저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육촌쯤 되는 동네 친척아저씨말을 믿고 올라왔는데 실상은 연고 없이 맨땅에 헤딩하는 거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살림방 하나 딸린 만화방부터 서예학원, 중장비업, 비디오소극장 등 여러 직업을 거쳐 어렵사리 가족의 생계 걱정을 더는 자영업자로 안착했.


우리 가족은 여덟 명이었다. 할머니와 엄마 아빠 그리고 오빠 , 언니, 셋째 오빠, 막내인 나까지 3대가 한집에 모여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큰오빠가 부모님과 함께 서울살이를 시작했고, 다음으로 막내인 내가 제일 먼저 전학을 왔다. 열네 살 때 전학 온 이후로 4년 동안 다섯 번의 이사를 했다. 첫 번째 집은 다락방이 딸린 단칸방이었. 오빠가 다락방을 썼는데 누우면 손이 닿는 천정에 어떤 문장들을 볼펜으로 깨알같이 적어놓고는 읊조렸다. 시골집에는 방만큼이나 넓었던 광 - 다락방이나 다름없는 -  세 개나 되었는데 그보다 좁은 공간에서 잠을 잔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서울 하늘 아래 사는 일이 그런 것이려니 생각해 버렸다.


다음 해 2층짜리 단독 주택으로 이사했다. 1층 총면적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방 두 칸짜리 전세방이었. 옆집하고 거실 통로를 같이 썼는데도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부엌문으로 난, 벽돌집과 담벼락 사이 좁은 길로 드나들었다. 가끔 거실 통로를  걸어 나갈 때면  한쪽 벽면에 자리한 장식장 안의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울긋불긋한 무늬의 화려한 커피잔, 접시들이 반짝였. 나랑 동갑내기가 사는 2층 주인집에는 털레비전에서 보았 검은색 가죽 소파가 거실 중앙 차지했고, 동갑내기 여자아이 방에서 놀 때는 레이스 달린 침대 커버 위에 걸터앉아, 이런 방에서 혼자 잠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다. 마음 한편으로는 넓은 시골집을 그대로 옮겨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해가 지나고 부모님이 서울살이 시작한 지 6년 만에 집을 사서 이사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1층짜리 주택이었다. 세를 끼고 산 집에 아버지는 건설업자를 끼고 직접 관여하며 2층 집완성했다. 1층에서 어수선한 가운데 몇 달을 살다 2층 집으로 옮겨가면서 시골집을 정리했다. 아래층에 세 들어 사는 끝집 아저씨가 종종 술주정하며 아줌마랑 싸우는 소리가 골목을 떠들썩하게 했고, 3대가 모여 살게 된 우리 가끔은 고부갈등으로 인해 언성이 높아졌다. 늘 재잘대며 어른들 이야기에도 거침없이 끼어들어 퉁박을 듣던 내 목소리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말 수가 다. 그러는 사이 열일곱 살이 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 집은 여섯 가구가 사는 연립으로 한번 더 이사했다. 혼자만의 방을 꿈꿔 볼 생각도 못한 채 북적대며 살았지만 시골 마을에는 서울살이에 성공한 부잣집으로 소문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반 친구가 자신의 집에 한 친구와 나를 초대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엄마가 외출하는 오후 시간에 집에아도 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버스에서 내려 친구가 는 목동 신도시 아파트 입구걸어갔다.  검은색 중형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져 나가다가 멈추고는 창문을 내렸다.

"엄마. 이제 외출하는 거야?"

친구가 차 옆으로 몇 걸음 뛰어갔다.

"지금 오는 거니? 친구들이구나."

"응. 얘들아 인사해. 울 엄마야."

"안녕하세요."

선글라스를 쓰고 직접 운전하는 친구 엄마의 모습에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나는 뼛거렸다.

"식탁에 챙겨놓은 거 먹고, 잘 놀다가렴."

나긋나긋한 서울 말씨의 목소리가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같이 간 친구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자,  "너희 집 몇 평이야?"라고 물었다. 친구는 "45평인가, 정확히 모르겠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우리 집 전체 평수만큼 돼 보이는 거실 가죽소파에 가방을 내던지고는 주방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부모님 하고 오빠랑 네 식구가 사는 친구네 집은 빈 방이 있었고, 서재라며 방 문을 열어 보여주었다. 한쪽 벽면 책장을 가득 채책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니랑 할머니랑 함께 쓰는 우리 집 작은 방이 떠올랐다. 셋이 누우면 머리맡에 놓인 책상 겸 책장에서 넣었다 뺐다 하는 책상을 밀어 넣고 자야 하는 방이었다. 괜스레 얼굴이 후끈거렸다.


구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아파트에서 점점 멀어졌다. 집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주택 사이로 난 골목을 터덜터널 걸어갔다. 낡은 연립이 먼발치로 보이며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그 위로 오버랩되었다. 앞마당에서 빨래를 개키며 얘기를 나누던 엄마와 101호 아줌마가 호들갑스럽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괜스레 신발로 작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느리게 걸었다. 어느새 가까워지자 "이제 오니?"라고 묻는 엄마에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샐쭉한 얼굴로 현관문에 열쇠를 꽂았다. 아침에 세수하고 밥 먹고 옷을 갈아입은 후 식구들한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밝게 웃으나왔던 집이 낯설었다. 멋진 삶에 대한 동경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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