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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Nov 01. 2023

노후된다는 건

- 애정하는 마이 카(my car)






노후되는 것은 인간의 몸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삶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도 기계도 물건도 시간이 흐르면서 노후되거나 닳아 없어진다. 그래서인지 내 몸도 건강검진을 하면 추적 관찰하세요, 기타 권고사항입니다,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정상범위에서 벗어난 항목들이 늘어난다. 게다가 집에 있는 물건들도 부쩍 서비스센터에 연락할 일이 빈번해졌다. 비교적 별 탈 없이 사용해 오던 정수기, 비데, 인덕션 등 가전제품이 번갈아 가며 오작동을 일으키며 돈을 달라고 아우성친다. 그래도 이 정도는 봐줄 만하다. 나를 가장 겁나게 하는 것은 자동차다. 기계치인 나는 자동차의 오작동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쩔쩔맨다.


그런데도 람이 아닌 물건 중에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이 있다면  단연코 마이카(my car)다. 나는 2009년 가을에 마이 카를 만났다. 기존에 몰던 세피아 차량이 낡아 바꿔야 하는 시점이었다. 어떤 차량을 선택해야 할지 여러 상황을 고려하며 신중히 선택했다. 사람들을 자주 만나 고객관리를 하는 일의 특성상 남들에게 보이는 이미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중형차를 몰고 싶은데 경제 상황은 차를 소유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형편이었다. 게다가 신용 상태도 좋지 않아 친정아버지의 명의를 빌려 구매할 계획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인터넷을 검색해 중고차 바이백 할부라는 걸 찾아냈다. 3년 동안 할부를 내면서 타고 이후에 차를 인수하거나 반납하는 방식이었다. 친정아버지를 모시고 매장에 들렀는데 은하색(은은한 하늘색) SM5 차량이 첫눈에 들어왔다. 파스텔톤의 푸른 하늘색 차량을 보는 순간 설렜다. 이전 차주가 출퇴근 용도로 3년 동안 3만 킬로 몰았던 차량이었다. 몸에 딱 맞는 옷을 걸친 것처럼 운전석에 앉았을 때 나와 마이 카와 합체되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명의를 빌려주는 일에 못마땅해하면서도 본인 명의의 중형차가 생기는 것에 좋아하는 눈치셨다.


실제로 마이카는 친정 부모님과 함께 달린 세월이  상당 기간을 차지했다. 크고 작은 병치레가 많았던 친정엄마와 보호자로 동행하시는 아버지를 태우고 왕복 한 시간가량 일산 병원을 오갔고, 어느 해부터는 보호자로 동행하던 아버지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아 반대의 입장이 된 부모님을 태우고 강변북로를 달렸다. 마이 카를 타고 달릴 때마다 부모님은 '미안하다', '고맙다'를 녹음테이프 재생하듯 말씀하셨다. 가끔은 차 정비에 보태라며 용돈을 주셨다. 지금은 아버지가 앉았던 뒷좌석 한자리를 비워둔 채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오가지만 아버지의 미소는 여전히 그 자리를 따스하게 채운다.


마이카는 부모님과의 추억뿐 아니라 내 삶의  한가운데를 함께 달려오며 열 일을 했다. 지워진 블랙박스 속에서 지난 시간을 모두 복원할 수 있다면 한 편의 장편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한 달에 30만 원이 조금 넘는 할부를 내는 중고차였지만 겉보기에 새 차와 다름없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중형차 타는 걸 보니 사업이 잘되나 봐.', '형편이 어렵다더니 중형차 타는구나.'라며 한 마디씩 건넸다. 어떤 날은 마이 카와 함께 달리며 답답한 마음을 털어냈다. 공원 옆 한적한 길에 마이 카를 세우고 잠시 쉼을 갖는 시간도 달콤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14년을 함께 달리며 20만 로를 찍었다. 이전 차주가 3년 운행한 3만 키로를 빼면 17만 로를 달렸다.


마이 카를 타고 서울 경기 외곽순환도로를 몇 번이나 돌았을까?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의 다리를 몇 번이나 건넜을까?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고 함께 달려준 마이카에 미안한 마음도 있다. 마이 카를 구매하고 상당 기간을 정비소에 가는 걸 기피했다. 수리비가 많이 나올까 봐 엔진오일 교체시기도 번번이 놓쳤다. 그러던 어느 해엔가 정비소 사장님의 조언이 귀에 들어왔다. 자동차는 연식, 로수 상관없이 관리하기 나름이라는 얘기를 새겨듣고 주기적으로 정비했다. 기계치인 내가 마이카에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덕분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비소 사장님이 관리 잘 된 차라고, 30만 키로도 끄떡없다고,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마이 카도 세월을 비켜가긴 힘들었나 보다. 한두 달 사이 갑자기 시동이 안 걸리는 일이 두 번이나 발생해 긴급 출동 서비스를 불러 정비소로 이동했다. 원인을 찾지 못하다가 연료 탱크가 노화된 것으로 근접하게 일단락 지었다. 한시름 놓았지만 놀란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불안하다. 1년 후 이사할 때까지 조금만 더 버텨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주차장이 너무 협소해서 새 차로 바꾸기에는 시기적절하지 않아서다. 애틋함이 마음 한가득한 마이 카지만 이별할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느끼며 마음 한쪽이 허전하고 쓸쓸해진다. 노후된다는 건 사람도 기계도 물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인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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