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방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마
피비가 목마를 타고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며, 불현듯 난 행복감을 느껶으므로. 너무 행복해서 큰소리를 마구 지르고 싶을 정도였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피비가 파란 코트를 입고 회전목마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정말이다. 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제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같겠지만 말이야
사춘기 소년의 눈으로 본 세상
콜필드 홀든은 감수성이 풍부하며, 순수하며, 수줍은 많은 소년이다. 그의 예민한 감수성에 어른들의 세계나 가정 그리고 홀든의 친구들을 홀든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눈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을 지배하며, 사회에서 필요한 법들을 강요한다. 하지만 그것에는 모순점이 있다. 바로 어른들은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아름답게 살지도 못하면서 교과서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홀든은 이런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거짓과 가식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홀든은 어른들의 세상을 비판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홀든은 어른들의 가식과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비판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한 사람이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투명성에 기반을 하는 것이다. 투명성이란, 자신이 한 말에는 자기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거짓말을 잘하는 내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어떤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돼' 라고 조언을 하면 그 친구는 내 말을 듣지도 않을 것이며 '너나 잘하세요'라고 할 것이다. 즉,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어른이 된다. 그와 더불어 자식이 생길 것이다. 그때, 그 아이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칠 때, 내 자신이 그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며, 지킬 수 있을 때, 어린 홀든들에게 우리는 가식적인 어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창녀와 대화하는 소년
홀든은 집에서 가출을 하여 창녀를 부른다. 하지만 성관계를 맺기는 커녕 그녀와 대화를 하려고 한다. 이것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첫번째로 홀든은 그녀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창녀라는 존재는 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창녀는 남자에게 있어 상품일 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말을 거는 홀든은 그녀를 하나의 인격으로 보았다. 오히려 최근에 수술한 창녀의 건강상태를 더 걱정해주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창녀는 아마 홀든과 비슷한 또래가 아니면 그 보다 조금 위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둘은 서로 대조를 이루는 인물인데 홀든은 아직도 순수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거래 관계로 본다는 것이다. 즉, 그녀는 너무나 빨리 어른이 된 것이다. 하지만 둘다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두번째 생각인데, 그 둘다 사회에서 최극단에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너무나 감수성이 풍부하여 어른들의 권위와 제도를 거부하여 집을 나온 홀든이나 자신의 생계를 위해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창녀의 모습은 둘다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사회 속에 속해 있으며 누군가와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홀든이 창녀를 이해하는 것은 작가의 억지가 아니다. 이미 홀든은 사회의 끝에 있기 때문에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너무 지옥같아도 한 송이 꽃은 피기 마련이다.
홀든의 여정은 청춘의 고민이다. 그 고민의 끝에는 피비가 있었다. 그가 찾아 헤매던 것은 바로 순수한 아이였고, 그 순수함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홀든을 보면 어린왕자의 청소년기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홀든 자체도 타락했던 인물이었다. 수없이 방황을 하고 어른들이 듣기에 바보같은 소리도 하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도 사회에 조금씩 물이 들면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타락한 어른들의 세계에 속해져 가던 홀든은 자신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서 호밀밭이라는 자신의 이상향 혹은 네버랜드로 떠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살기에 사회는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피비를 보면서 자신의 낙원으로 떠날 것을 그만둔다. 먼저, 홀든이 그 이상향에 간다해도 홀든이 말한 호밀밭은 이 사회 속에 존재하는 곳이다. 이와 더불어 그가 떠났어도 그가 생활하는 이곳이나 그곳이나 고통은 여전할 것이다. 하지만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홀든은 하나의 희망을 본다. 그것은 바로 피비였다. 홀든이 보기에 가식이 존재하는 이 땅에도 순수하게 말을 걸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홀든이 살아가게 될 힘이 된 것이다. 그와 더불어 그는 이 세상에서 피비같은 아이들을 지키며 괴로운 세상의 파수꾼이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지금 당신이 방황을 하고 있다면, 포기하지말고 그 방황에서 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길...
누구나 방황을 한다. 청소년만이 방황을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서른 살이 먹어도 방황을 하고 나이가 들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나하며, 방황을 하기도 한다. 즉, 방황이라는 것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방황을 하게 되었으면,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포기해버리면 그 방황은 귀신이 되어 시간이 흐를 때마다 다시 나타날 것이다. 방황을 하고 고민하는 것은 축복된 일이다. 자신이 성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방황이라는 것은 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사랑하는 사람도, 그 고민을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다. 방황은 어찌보면 뼈를 깎는 아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워하면 안 된다. 다만, 방황과 고민을 할 때, 삶에 타격을 주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본분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해야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홀든처럼 방황과 고민의 괴물에 먹혀서 자신의 삶을 못 돌볼 때가 있다. 청소년 시기에는 젊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나이가 들 수록 고민의 늪에 빠지면 안 된다.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남는 시간에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처절하게 찾아라, 그리고 처절하게 답을 갈구해라. 그러면 어느 순간 당신은 투명한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