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리뷰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처음 보고 나왔을 때는 영상미 넘치는 야동 한 편을 본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요즘 <곡성>이나 <아가씨>라는 영화들을 볼 때 느낀 점은 그 영화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를 즉각적으로 보고 나서는 무슨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한 번에 느낌이 안 오기 때문이다. <아가씨>를 바라 볼 때 인물들의 행동도 중요하지만 나는 <아가씨>의 핵심이 바로 도서관이자 서재에 대한 해석 없이 영화를 해석한다는 것은 반쪽짜리 해석이라고 본다. 이 서재에 대한 중요한 해석을 통해서 인물들의 행동이 오히려 명확해지는 것은 재미있는 점이다.
코우즈키의 서재
코우즈키의 서재는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감각들이 살아 넘치는 장소이다. 코우즈키의 서재는 코우즈키가 창조한 인공정원 그 자체이다. 서재 내에는 인공적인 식물들이 자라고 있으며 인공 연못이 존재한다. 코우즈키의 서재에는 동양적인 미와 서양적인 미가 공존하는 곳이다. 그와 더불어 수없이 많은 야설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 서재는 그의 조카인 히데코가 책을 읽어 주면서 연극을 하며 극단적인 성행위를 연기로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 서재는 바로 코우즈키의 극단의 감각들을 공간화한 장소이다. 영화 속에서 박찬욱 감독이 코우즈키의 서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 공간이 새로운 감각을 찾고 쾌락과 탐미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서재는 코우즈키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자신의 야설들을 읽어주는 히데코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 자유함을 느낀다. 즉, 사회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성행위와 체위같은 것들은 그의 인공 정원 속에서 상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히데코가 책을 읽어 줄 때 코우즈키의 서재 안에는 새로운 공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미지를 파는 여자 히데코
<아가씨>에서 히데코의 첫번째 모습은 매춘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매춘부들은 자신의 성을 팔러 갈 때 그녀들이 파는 것은 바로 이미지이다. 매춘부들은 과도하게 인공적인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으며 자신의 성격과는 다르게 연기를 하는 존재들이다. 매춘부들이 파는 것은 성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파는 것은 인공적인 미이다. 비록 히데코가 매춘부는 아니었지만 이모부인 코우즈키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연기를 하는 것은 매춘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히데코가 많은 일본인 고위층 앞에서 책을 읽어주고 연기를 하는 것은 남자들이 사회 속에서는 하지 못하는 그런 퇴폐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존재 그 자체였다. 이곳에서 히데코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었고 단지 사물이었고 인형이였다. 특히나 코우즈키의 서재 안에서는 그녀는 서재의 일부였을 뿐이다.
남자를 파괴하는 여자 히데코
히데코는 코우즈키의 서재를 떠나면서 팜므파탈적인 여성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이용하려는 백작을 파괴하는 여성이 된 것이다. 나쁜 남자로 대변이 되는 백작은 여자를 모독하는 존재이다. 백작은 여자들을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지 목적이된 존재를 대우하지 않는다. 히데코는 남자들의 약점인 여성의 성으로 백작을 유혹하고 그를 파괴시킨다. 백작은 히데코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차지하고 싶지어 한다. 히데코는 그의 생각을 읽고 그를 수면제로 재우고 쿠우즈키의 사람들에게 백작을 잡혀가게 만들어 버린다. 궁극적으로 백작은 코우즈키에게 잡혀가게 되고 담배에 독약을 희석시켜 자신은 자살을 함과 동시에 코우즈키를 사망에 이르게 만든다. <아가씨> 속에서 히데코가 백작을 파괴시키는 장면이 코믹하게 가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성들을 도구처럼 이용하는 백작과 코우즈키에게 복수를 한 것이다.
성녀가 된 히데코
히데코와 숙희는 먼 곳으로 떠나게 되고 마지막에는 둘이 즐거운 모습으로 성행위를 하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솔직히 방울이 나오는 장면이 조금 충격적이긴 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마지막에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였던 것은 여자의 순수성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남자와 여자가 성관계를 가질 때 <아가씨>에 나온 남성들은 여자를 정복하고 복종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감독이 끝까지 히데코의 처녀성을 파괴시키지 않고 남자에게 범해지지 않는 순결한 여성으로 만든 것은 히데코가 여성들을 성적 노리개로 만드려는 남성들로부터 더렵혀 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히데코가 백작과 결혼식을 하고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순결을 지켜낸다. 그녀가 숙희와의 관계를 가질 때 그것이 괴로워 보이고 눈을 찌푸리지 않게 만들며 오히려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둘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이기 떼문이다. 히데코가 궁극적으로 성녀가 되는 모습은 그녀가 비록 코우즈키의 서재에서 퇴폐적인 존재로 시작했지만 숙희의 등장과 구원으로 인해 그녀가 바뀌게 된 것은 재미있는 점이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 나의 타미코, 나의 숙희
숙희는 부자들을 사기를 치는 사기꾼이었다. 히데코에게 다가갈 때도 숙희는 히데코를 사기치고 정신병원에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숙희는 그녀를 진심으로 공감하게 되고 그녀의 아픈 과거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여자들은 신기한 존재이다. 일본어에서 히데코( 秀子)이다. 그녀의 이름은 수려한 사람 혹은 빼어난 사람이다. 그와 달리 숙희의 일본어 이름인 타카코(民子)이다. 즉 서로가 다른 계층과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더라도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공감하며 종국에는 사랑으로 이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름답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여자이기에 같은 여자를 알고 그녀의 아픔을 알고 사랑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이 영화가 예술 야동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