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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Mar 19. 2017

책과 야수를 사랑했던 벨 그리고 디즈니에 대한 단상

<미녀와 야수> 리뷰



이번에 디즈니의 명작 <미녀와 야수>가 실사 영화가 되었다. 색감도 좋고 화려한 연출로 인해서 눈을 즐겁게 한다. 원작 <미녀와 야수>의 주제는 외모 보다는 내면의 세계를 보라는데 초점을 두었지만 디즈니에서 각색한 <미녀와 야수>는 그보다 더 나아가서 진취적 여성에 대한 모습에 더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는 여성 벨의 사랑


<미녀와 야수>를 보다보면 그 당시가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의사들의 무시무시한 까마귀 비슷한 가면을 보여주면서 <미녀와 야수>는 서양의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사이의 변화의 시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교회의 권력은 점점 쇠락해 가고 있었다.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교회가 남녀의 결혼을 이루어 주었다. 교회가 사회권력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교회에서 부부승인을 하고 재산 상속권을 부여하는 것은 교회의 승인이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남녀간의 자유 연애 결혼은 거의 불가능했다. 주인공 벨이 책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매우 급진적이었다. 그당시 평민들에게 앎에 대한 욕구는 죄악시 되었다. 중세가 암흑시대라고 하는 것은 지식에 대한 열망이 인간이 신이 되고 싶다는 욕구로 비추었기 때문에 이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벨이 책을 좋아하고 아버지가 발명가라는 것은 중세 시대에서 괴짜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다. 중세 시대 사람의 일반적인 사고는 세상이나 지식에 대해 알 필요가 없고 오로지 신이 부여한 질서와 사회에 순응을 하는 것이 다였기 때문이다.


벨이 지식에 대한 열망과 사랑이 이어진다는 것이 어의없게 들리지 모르지만 진리에 대한 사랑과 사랑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 시대에 플라톤의 저작 <향연>에서 에로스 즉 사랑에 대한 설명을 해놓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큐피드이자 에로스는 인간과 신 가운데 존재하는 '중간자'다. 플라톤이 소크레테스의 입을 빌려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늘 좋은 것이 언제나 나에게 있게 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인간이 사랑을 갈구하는 이유는 사랑에는 결핍과 수단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홀로 사랑할 수 없다. 대상이 있어야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한다 하여도 계속 사랑을 의지적으로 해야지 대충 홀대하게 된다면 사랑은 사라지게 된다. 진리 또한 그렇다. 우리가 알고 싶어하고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중간자의 존재에 서있는 인간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 자신을 초극하는 존재다. 사랑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인간은 계속적으로 자신의 기존의 모습을 벗어나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넘어가고 싶어한다. 벨이 책을 읽고 지식을 얻고 싶어하는 모습이 야수와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은 매우 치밀한 전개다. 중세 말기 시대에 여성이 그리스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은 진취적인 것이다.



벨의 모습에 보였던 야수


<미녀와 야수>는 카를 융의  페르소나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개념을 도입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전복시킨 것이다. 융은 남녀에 상관없이 인간에게는 남녀 안에 양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남자 속에 존재하는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한다. 여성 속에 존재하는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지칭했다. 아니무스는 진취적이고 합리적인 성향이며, 아니마는 몽상적이고 인간 내면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다. 인간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이 나오는 이유는 아니마와 아니무스 중 한 쪽이 억압을 받기도 하며, 양쪽이 모두 해방될 수도 있다. 융은 인간에게 있어서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균형있게 발현되는 인간상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미녀와 야수>에서 벨은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모두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중세 시대는 가부장적인 시대이며 특히 성모 마리아 같이 현모양처가 될 것을 요구 받는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마초적 남자인 게스톤이다. 게스톤은 벨이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되기를 원한다. 이런 사회 속에서 벨의 아니무스는 억압을 받는다. 아니마는 활성화되고 아니무스가 억압을 받는다고 아니무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무스는 내면에서 억압된 모습으로 외부에 표출되게 된다.


<미녀와 야수>에서 벨은 현모양처와 같은 여성성을 강요받는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중 한 쪽이 억압당하면 한 쪽은 페르소나(사회적으 나타나는 모습)과 그림자(내면에 나타는 모습)으로 나뉘게 된다. 벨은 천상 여자이다. 하지만 그녀 안에 억압되었던 아니무스는 짐승이나 야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벨이 야수의 성에서 야수를 만날 때 남성에게 야수의 이미지를 남성에게 투영해 버린다. 그래서 야수처럼 보이는 것이다. 나중에 게스톤의 총에 맞은 야수에 대해서 사랑과 눈물을 보이며 공감을 하자 야수는 잘생긴 왕자님으로 변하게 된다. 야수에 대한 공감이 그동안 억압 받았던 아니무스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자 짐승 같던 아니무스는 정상의 모습을 되찾는다. <미녀와 야수>는 다양하게 해석이 되지만 융의 관점으로 보자면 마법에 걸렸던 것은 벨의 마음이었다.



인간의 유한성과 사랑


<미녀와 야수>는 서양인들이 가지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벨의 아버지와 벨을 쫓았던 늑대들은 시간의 형상이다. 서양에서 시간의 흐름은 검은 말로 형상화 되었다. 그래서 <반지의 제왕>에서 흑기사가 부정적 느낌을 주는 것이다. 늑대 또한 그렇다. 늑대는 빨리 달리고 더 나아가 입으로 무는 존재이다. 서양인들은 늑대의 형상화가 시간이 자신들을 물어서 죽음으로 몰고간다고 보았다. 마법에 걸린 야수의 집사들이 마법의 장미가 하나 하나 떨어질 때도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시간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이다. <미녀와 야수>에서 그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것은 벨과 야수의 사랑이다. 사랑과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는 역전을 이루게 만들어 준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기 때문에 추하다. 그러나 그 추한 것,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은 값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영원히 산다고 가정을 하면 사랑이 값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의지이기 때문에 그 의지를 영원히 간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나 끝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숭고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디즈니의 성공비결... 환상을 심어라!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나는 디즈니를 보고 자랐던 세대다. 아직도 <라이온 킹>에서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가 죽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동양권 문화에서는 덜하지만 서양권 문화에서 디즈니는 세상 전반에 모두 침투해 있다. 미국을 가도 디즈니 매장은 아주 많으며 많은 아이들이 디즈니 가방을 매고 다닌다. 내가 <미녀와 야수>를 보면서 즐거움을 느꼈던 것을 생각해보면 예전에 보았던 <미녀와 야수>가 많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고달픈 삶을 살아가면서 잊었던 동심의 세계가 나에게 열려서 그랬던 것 같다. 사실 디즈니에서 나온 영화나 상품에 대해서 나는 관대하게 소비를 한다. 왜냐하면 디즈니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교훈적이고 재밌고 환상적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환상 속에서 우리는 디즈니의 환상과 현실은 간과해 버린다. 디즈니의 영화나 만화를 보면 희망이 차고 특히 나와 같은 세대이거나 조금 윗세대는 디즈니를 보고 자랐다. 우리에게 있어서 디즈니는 꿈과 희망이며 동심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디즈니는 우리에게 소비를 부추기며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의 가까이에 있으면 디즈니의 환상을 심어주었다. 나도 이렇게 디즈니의 민낯을 생각하지만 영화가 개봉하면 디즈니의 영화를 보러간다. 아이러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매체를 통해 나온 디즈니라는 문화의 힘이 얼마나 우리를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지 말이다. 미국에는 아직도 동성애 혐오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있지만 디즈니는 영화에 흑인과 동성애 코드를 넣고 이를 포용한다. 마치, 미국이 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래는 목차입니다!!!!!!!!!


오늘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어쩌면 어제였나, 나는 모르겠다. 

서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며 
12 압구정동 :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중입니다 
22 강남대성학원 : 답을 잘 찍는 사람이야말로 승자다 
30 N타워 : 나는 죽지만… 너는 살아… 왜냐하면… 
38 신촌 : 아프니까 왜 청춘이냐 
46 강남역 : 아침에는 영어 학원으로 
54 경복궁 : 설현은 안중근 의사를 몰라서 눈물을 흘렸어 
61 대학로 : 김제동의 농담 
68 한국은행 : IMF 이후 한국에 등장한 근대적 인간들 
75 KBS 방송국 : 셀카 찍는 사람들의 고독 
83 광화문 교보문고 : 1년에 한권도 읽기 힘든 당신에게 

서울 속의 우리에 관하여 
94 강남역 : 무차별 살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102 K-Star Road : 대중들은 아이돌을 고르느라 샤샤샤 
109 종로 3가 : 어느 개저씨의 죽음 
116 잠실 롯데월드 : 헬리콥터 맘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124 쉑쉑버거 강남역점 : 힐링사회의 그늘 
132 청담동 유흥업소들 : 강남패치와 희생양 
140 홍익대학교 : 홍대 앞에 나타난 거대한 일베 조각상 
147 서울시립미술관 : 이게 미술이냐 
153 선릉역 : 결국엔 무엇이 남을까 
162 광화문 광장 : 광화문 광장에서 희망을 보다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174 서울대학교 : 대학은 학문하는 사람을 키우는 곳이다 
181 구룡마을 : 인생을 포기하게 만드는 나라 
188 삼성동 한전 부지 :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지킬 권리가 있다 
195 JTBC 방송국 : 직업으로서의 기자, 소명으로서의 기자 
202 여의도 국회 의사당 : 시인이 정치인이 되는 사회 
209 여의도 증권가 : 한국형 블랙프라이데이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 
217 서초동 사랑의 교회 : 사랑의 그 무게 
225 서초동 대법원 : 나의 위선의 가면이 진실된 가면이 되길 
232 신림동 : 국민을 광인이라고 배제시키지 말라 
240 서울시청 앞 광장 : 나에겐…… 우리에겐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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