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가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
카프카는 사회라는 곳이 일종의 감옥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록 개인은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음으로 유추를 할 수 있다.
그레고르는 거실 안으로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고, 안쪽에서 단단하게 걸린 한쪽 문 판자에 의지하여 서 있어서 그의 몸은 반쪽과 그 위로 갸우뚱하고 있는 머리만 보였고, 그렇게 그는 다른 사람들을 물끄러미 건너다 보았다. 그 사이에 날이 훨씬 밝아져 길 건너편에는 마주 서서 끝없이 이어진 회색 건물 -그 것은 병원이었다.-의 한 부분이 뚜렷하게 보였는데, 그 전면을 엄격하게 꿰뚫고 규칙적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이 와 동시에 그곳(병원)은 가부장제 가족의 신화 속에서 유지된다. 즉, 그곳은 환자와 감시인이 지도자와 관리진의 권위 아래 모여 있는 커다란 형제 공동체이고자 한다. 결함도 자기만족도 없으나, 올바를 뿐만 아니라 성서에 나오는 훌륭한 가족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엄격한 가족. “관리 인들이 주의 깊고 현명한 부모처럼 거의 자식이 부모에게 내보이는 것과 같은 애착에 의해 보상되었다.
병원이라는 곳은 미쉘 푸코의 설명과 같이 가부장적인 곳이다. 소설 속에서 그레고르가 병원을 질서와 엄격함을 느끼면서 그곳은 카프카가 보는 세상을 병원으로 표현한 곳이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세상은 가부장적인 사회여며, 권위주의적이고 개인의 실존을 밀어 붙이는 곳이다. 병원 속에서 인간은 주체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즉 카프카는 규칙적이고 사람들을 획일화 시키는 사회 속에서 숨이 막혔을 것이고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던 것이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세상은 부조리한 곳이며, 개인이 개인의 실존을 상실해 버리는 곳이다. 그곳에서 카프카 또한 아버지로 표현된 사회에게 억압을 받게 된다. 이런 억압 속에서 카프카는 소극적 저항을 하기에 마음을 먹는다. 카프카가 취한 방법은 소극적인 저항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저항방법
『학술원에의 보고』는 인간이 되려고 하는 원숭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원숭이는 출구를 갈구한다. 그에게 있어, 출구를 갈구하게 된 것은, 그가 사람들의 쇠창살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즉, 물리적으로 쇠창살에 갇혀 버렸고, 탈출을 하고 싶어한다. 배에서 그가 생각한 탈출은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배에서 탈출을 하여 자유를 얻게 되고,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자유라는 것을 그는 어렴풋이 느낀다. 그러나, '죽는 것이 과연 자유일까?'라는 생각을 하고, 그는 탈출을 하지 않는다. 그대신, 그는 인간들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인간의 흉내를 낼 수록 사람들은 그에 대해 관대해지고, 원숭이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 믿는다. 그리하여, 그는 원숭이에서 인간의 길을 걷기로 마음 먹는다. 즉, 인간처럼 사고하고,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원숭이... 그러나, 그는, 곡예사들을 보면서, 인간들이 자유를 갈구하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곡예사들이 날고 뛰는 것은 과거 자신이 하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원숭이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인간이 되었지만, 진정 인간들이 원하는 자유는 원숭이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즉, 자유라는 것이 우리의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지만, 과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자유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자유라는 것은 너무나 추상적인 개념이며, 한 문장으로 '자유란~이다.'라고 정의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카프카의 관점에서, 상대적인 것이며, 각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관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카프카가 말하는 세상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는 원숭이가 배에서 느겼던 감정과 같이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다. 즉 죽음이 구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출구라는 것이 존재를 하는 것인가? 이 세상을 탈출하는 법은 없다. 현실을 도피한다는 것, 또한, 세상 속을 외면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언제나 도피자들의 옆까지 따라가 버린다. 즉, 카프카가 생각한 세상의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술원에의 보고'에서 원숭이는 현실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탈출에 대해 포기를 한 것이다. 즉, 원숭이는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에 서있는 존재이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니면, 그의 존재 또한 몽환적이다. 그러나, 어쩌면, 프란츠 카프카가 현실에서 살아남으면서, 자유로 표상한 것이 어중간한 존재이다. 그 어중간함은 바로 무의미한 존재로 뜻이 환언 될 수 있다.
무능력의 의미
벌레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벌레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있어서 더럽고 역겹고, 함께하고 싶지 않은 존재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벌레라는 존재를 사회에 가지고 오면, 벌레는 무능력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사회 속에서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의 현대 사회는 경제적 관점이 중심이 되는 사회이다. 경제가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필요한 존재와 필요하지 않은 존재를 나누는 기준은 바로 효율성에 달려있다. 경제 관념이 자리잡은 사회 속에서 필요한 존재는 바로 돈을 잘 벌고, 최소의 투입으로 많은 산출을 낼 수 있는 존재이다. 무능력한 존재는 누구인가? 아래의 예를 보면서 그것을 우리는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변신』의 주제는 목표가 결핍된 문학의 고통, 희망과 절망이 끝없이 서로 응답하는 소용돌이로 독자를 몰고 가는 문학의 고통에 대한 예시이다. 그레고르의 상황은 실존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의 상황 그 자체이며, 실존한다는 것은 언제나 실존으로 다시 떨어진다고 선고받는 것이다. 벌레가 된 그는 추락의 상태 속에서 계속 살아가고, 동물의 고독 속으로 빠져들면서 부조리와 삶의 불가능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분명 그는 계속 살아있고 그의, 불행을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불행의 내부에서 마지막 수단, 마지막 희망을 전달하는데, 소파 아래의 벽이 주는 상쾌함을 향한 짤막한 여행을 위해, 불결함과 먼지 속에서의 삶을 위해 그는 줄곧 싸우고 있다.
벽이 주는 상쾌함을 향한 여행이라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향한 여행이다. 그 여행이라는 것을 이 세상속에서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경제적 합리성을 가지 못한 사람일 것이고, 돈이 되는 일을 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인문학을 하는 사람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무능력한 존재이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돈을 잘 버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시를 쓴다거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큰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벌레라는 존재는 자신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주위의 세상에 대해서 더 느낀다. 다음의 예를 보자.
그런 일이 있자마자 그는 이 아침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작은 다리들이 굳이 바닥을 딛고 섰던 것이다, 다리들이 완전무결하게 말을 들었고 심지어 그가 원하는 쪽으로 그의 몸을 실어가려고 애쓰까지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는 기뻤으며, 벌써 모든 고통이 씻은 듯 다 낫는 일이 목전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걷는 것이 사소한 일이고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자신의 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더 나아가 자신의 실존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이처럼, 벌레라는 무의미한 존재는 사회적으로 무의미해 보이지만 자신의 실존을 찾아 떠나는 하나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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