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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an 30. 2016

고독을 아는 사람만이 사랑을 외칠 수 있다.

<말테의 수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장미꽃이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이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기꺼움이여,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묘비>
  


<말테의 수기>는 릴케의 유일한 장편 소설이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릴케의 자서전이라고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솔직해 이 책을 읽다가 쉬다가 읽다가 자다가 했을 정도로 읽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의 플롯도 없으며 그가 느낀 파리의 모습이나 과거 회상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읽기 쉽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독자를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책일지도 모르겠다.



파리에 산다는 것은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


첫 부분에는 파리와 그가 부유하고 귀족 생활을 했던 덴마크가 겹쳐지면서 책은 시작이 된다. 시인 릴케에게 있어서 파리라는 장소는 위협적이고 절망만이 있는 곳이다. 과거 자신의 할아버지의 죽음을 보는 릴케의 시선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전유물이며 특별한 것으로 여겨졌다. 즉 삶에서 탄생이 삶의 시작이었다면 그 끝인 죽음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파리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별로 중요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병원에서의 모습이 정말 인상적인데, 병원에서의 환자들은 마치 괴물의 형상이며 죽어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심한 의사들 뿐이었다. 파리라는 곳은 이런 곳이다. 바로 도시이며, 그 누구의 죽음도 특별하지 않은 곳이다. 또한 파리의 시간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데 2장에 나오는 니콜라이 쿠스미취의 시간 개념은 도시와 산업화가 시작되자 인간은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기 보다는 하나의 돈이나 단위로 환산을 한다는 것이었다. 젊은 릴케가 보기에 파리는 장소나 시간을 모두 규격화시키며, 사람들을 고독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파리라는 곳 바로 이 시대는 인간의 존재를 무의미하며 먼지처럼 만드는 곳이었다. 파리라는 도시는 릴케에게 있서 그 어떤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게 만들 수 없는 매정한 도시였다.


릴케의 어머니 사랑


<말테의 수기>를 보면 어머니의 존재가 정말 크다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거리를 두는 반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눈여겨 볼만하다. 릴케가 파리라는 도시의 절망에 대해 섬세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가 말테가 딸이었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는 말테를 가끔 소피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말테가 여성적인 감수성을 가지게 만든 요소였다. 말테는 소설 속에서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소녀처럼 행동을 했었다. 그러다 말테에게 있어서 커다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말테에게 충켝이 컸었는데, 자신에게 사랑을 주던 사람의 죽음이었다. 그것은 말테 즉 릴케를 고독하게 만들었고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것 같다. 바로 이때가 고독에 대해 릴케가 고민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말테의 수기>를 보면 고독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고독함 속에서 그는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자신이 혼자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 있기 때문이다. 공포라는 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이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은 새로운 사랑을 했을 때, 그 사람을 잃는 다는 것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릴케는 시인이야 말로 고독해야 한다고 하는데, 병이 난 사람이야 말로 병든 사람을 위해 시를 쓸 수 있고, 사랑을 잃어 보았던 사람이야 말로 사랑을 시로 쓸 수 있으며,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야 말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을 아는 사람이야 말로 사랑을 외칠 수 있다.


<말테의 수기>에 마지막에 보면 돌아온 탕자를 재해석한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탕자는 사랑을 하는 가족들은 그 사랑을 진정으로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사랑을 잃어본 사람이야 말로 그 참된 사랑을 알 수 있고, 놀아본 사람이야 말로 논다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탕자의 가족은 사랑을 잃어보지 않고 자신들 가족 공동체 속에서 사랑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탕자는 가족의 사랑을 등 뒤로하고 고독한 삶을 살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탕자의 입장에서 가족들은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릴케가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기 싫어 했던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누구나 사랑을 하고 소유하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생활이 익숙해지게 되고, 그 사랑의 의미를 퇴색하며 잊어버리게 된다. 릴케의 고독은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취했던 그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우리는 삶을 살다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을 하게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랑이 비록 어렵게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계속 사랑을 받다보면 그것이 하나의 권리와 같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보면 서로가 실수를 하게되고 이별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릴케에 대한 사랑은 바로 성자(聖者)의 사랑이다. <말테의 수기>는 고독 속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사랑하겠다는 릴케의 사랑고백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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