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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Mar 25. 2016

오토다케 히로타다, 그에게 도덕성을 묻다

<오체 불만족>의 작가 오토다케 히로타다 불륜 사건을 보고



초등학교 때, <오체불만족>이라는 책과 함께 오도다케 히로타다라는 인물의 삶이 방송을 통해 알려졌다. 어린 시절에 거의 책을 안 읽었지만, 그의 삶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의 책을 사고 초등학교 4학년 독서일기에 독후감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그의 책에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그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어떻게 그의 삶을 이겨냈냐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아마, 초등학교 시절 내내 그는 나의 우상이었고,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어 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16년 정도가 흐르고 불륜을 저리는 오토다케 히로타다를 뉴스를 통해 보게 되었다. 그냥, 기분이 떨떠름 했었다. 한 때는 나의 우상이었던 사람이 이렇게 슬픈 모습을 보이니 마음이 어려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토다케가 잘못이다 혹은 오토다케는 공인이 아닌데 왜 비판을 하냐는 글들로 나뉘어 지고 있다. 나는 오늘 그에 대해서 쓸 때, 그가 공인이고 뭐고 그런 것에 초점을 두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그의 행동에 책임감과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토다케, 그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해야 한다.


오토다케의 불륜 사건을 공인인가 아닌가로 그 초점이 모이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공인의 여부를 떠나서 오토다케와 같은 사람들 즉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높은 도덕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남들에게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한번 좁혀보면 나의 행동이나 말이 그 사람의 인생에 변화나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오토다케가 타인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림이라고 본다. 그의 책 '오체불만족'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희망을 주었다. 정말 힘든 사람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는 언행의 일치가 있어야 하고 자신이 하는 말에는 책임을 저야 한다. 나의 경우, 교회에서 훈련을 받고 성경을 가르치는 리더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대한민국 수없이 많은 교회들 속에 수 없이 많은 리더들 중 한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리더의 무게를 느끼며 고뇌한다. 그것은 첫번째로 내가 성경 말씀을 잘못 가르쳤을 경우 조원이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잘 못된 방향으로 성경을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경건 생활이라는 면에서도 만약에 내가 기도도 하지 않는데, 조원에게 기도를 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처럼 나 같이 무명의 교회 리더 또한 나의 행실에 조심을 가한다. 그 이유는 내가 믿고 따랐던 리더가 생활 면에서 악하고 더럽게 산다면 그 조원의 마음에 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한 것이다. 이처럼, 오토다케는 희망의 아이콘이었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다. 즉, 오토다케는 그가 우리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더 많은 도덕성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영향력을 가진 사람의 책임이다.


부인의 용서와 그 의미


나는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부인의 용서가 인상이 깊었다. 용서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녀의 결정은 위대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불륜은 여자의 마음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용서라는 것이 위대한 이유는 죄를 지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용서라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냥 간단히 생각을 해보면, 나와 나의 옆에 있는 동료가 같이 일을 하다 나의 잘못으로 그는 나를 혐오하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잘못을 빌었지만 그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고 그것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 당연히 그의 그런 태도는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그를 그냥 무시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볼 때마다 얼굴이 굳어지고 어떻게 하면 책을 잡을까로 골똘히 생각을 한다. 아마 그의 속은 지옥으로 일그러 있지 않을까?' 아처럼, 용서를 하는 것은 당연히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용서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위의 이야기처럼, 용서를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 뿐이다. 하지만, 용서라는 것이 쉬우면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용서라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할 때 가능한 것이다. 뭐 사랑이라 하면 너무 거창하니 적어도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길 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용서의 아이러니인데,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바람이 오히려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바로 용서의 아이러니다. 솔직히, 우리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힘들다. 그것은 내가 도덕적으로나, 삶으로써 잘못을 저지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관점으로는 죽었다 깨더라고 용서를 할 수 없다. 용서라는 것은 사랑의 다른 말이다.


오토다케라 히로타다라는 거울


나는 그의 불륜 사건을 보고 고민했다. 왜냐하면 나를 포함해서 그 누구나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모두가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부모가 될 것이고, 회사에서 중역이 될 것이고, CEO, 선생님 등등이 되어서 책임감을 느끼는 자리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일수록, 우리는 정말 많은 도덕성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사건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많은 책임감을 가지게 될 것이고,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수없이 많은 선택들 때문에 어느 순간 세상을 순수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잊어 먹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내가 젊은 시절 어떤 삶을 다짐하고 어떤 고민을 하고 살았는지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윤동주의 <서시>로 끝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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