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이번에는 <거울나라의 엘리스>가 영화로 나온다. 새로운 캐릭터가 나오는 것 같은데, 영화는 나와바야 아니까... 새로운 캐릭터 '시간'이 원더랜드를 위협하는 적으로 나오는 것 같은데, 아마도, 붉은 여왕이 시간 이야기를 해서 나온 캐릭터인듯 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정체성의 위기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다면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자신의 정신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시키려고 노력하는 모험이다. 그리하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보다 더 많은 위트와 말장난이 있다. 또한, 수없이 많은 과학과 수학적 논리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논리에 대해서 알기가 어려워서 문학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이번 거울 나라도 역시나 여러번 길을 잃었고 너무나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에도 앨리스와 함께 거울 나라로 여행을 떠나야 겠다.
트위들 디와 트위들 덤 "우리가 싸우는 걸 구경해도 돼. 너무 가까이 오지만 마. 난 진짜 흥분하면 눈에 보이는 대로 뭐든지 후려치거든"
앨리스의 거울나라의 여행의 입구는 바로 거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원더랜드로 가는 길이 수직적인 통로였다면 이번 거울 나라는 수직적인 길을 취하고 있다. 거울이라는 것은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도구이다. 하지만 거울이라는 것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정확하고 완벽하게 비추고 있냐고 물은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니다. 거울의 각도에 따라, 높낮이에 따라 우리의 세상은 변하게 비춰지기 때문이다. 외부세계에 대해서 불완전하게 비추기는 하지만 거울은 인간의 모습 중 내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앨리스에 나온 거울은 앨리스를 본질적 자아(내면의 자아)와 현실적 자아(지금 살아 숨쉬는 자아)로 나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서로 다른 두개의 자아가 화합하는 것은 아니다. 트위들 디와 트위들 덤처럼 대칭이 되는 대상들 혹은 다른 자아들은 서로간에 갈등을 가진다. 거울에 비친 자아의 모습은 자기 자신을 보여주지만 내면 세계에서는 현실적인 자아와 내면의 자아는 서로 화해를 하지 못한다. 그것은 현실과 내면 속의 자아 사이에 차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은 그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번 앨리스의 여행은 이 둘의 갈등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험프티 덤프티 "누가 주인이 되느냐지"
험프티 덤프티는 언어를 잘 구사하는 인물이다. 이를 보면 수학에 대해서는 맹초이지만 언어 능력은 나름 괜찮다. 그의 질문은 언어와 인간 중에 누가 주인이 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과 언어 사이에는 여러 개의 정의가 있지만 여기서는 강령적 정의와 약정적 정의만을 언급하겠다. 강령적 정의는 언어가 인간의 주인이 되는 모습을 취한다. 강령적 정의는 "~하기 때문에 ~해야한다"라는 의미를 닮고 있다. 우리는 타인들과 의사소통을 해야하기 때문에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언어들의 의미를 생각하며 사용을 한다. 이런 단어들에는 가치가 들어있을 수 있는데, 가령 '너는 나를 사랑해라'에는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의 의미가 달려있다. 하지만 여기서 언어의 구멍이 생기는데 사랑이라는 단어가 비록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는 의미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은 '사랑을 헌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플라토닉적 사랑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에 여러가지 개념이 들어 갈 수 있다. 이런 것은 시에서 잘 들어날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강령이나 사전적 의미의 단어 위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언어의 두 가지 측면이 보여주는 것은 언어라는 것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언어와 인간의 관계에서 언어와 인간은 긴장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하얀 여왕 "왕의 시종이 있어, 지금 벌을 받아서 감옥에 갇혀 있지 재판은 다음 주 수요일에나 열릴거야. 당연히 범죄는 가장 나중에 저질러 지지"
하얀 여왕은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인물이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에 모순적으로 시간에 갇혀 살게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시간을 통해 주체성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주체성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기억이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에 전후에는 시간의 인과가 존재한다. 내가 친한 친구와 이별을 하게되었다는 것을 하나의 사건이라고 해보자. 만약 기억이 시간과 관련이 없다면 나는 '친한 친구'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친한 친구'에 대해 내가 어떻게 그와 시간을 보냈고 어떤 계기로 그와 친하게 되었으며 어떤 사건이 그와 나를 이별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시간은 나라는 주체성을 가지게 하는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가 시간에서 주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면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두 가지를 선물 받았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이다. 우리는 주체성을 가지면서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이와 더불어 시간의 굴레에 떨어졌기 때문에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을 하얀 여왕이 이야기해 준다. 즉, 이런 관점에서 거울 나라는 죽음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거울 나라의 사람들은 언제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동화에서 앨리스는 그런 능력이 없는 것 같다. 즉 앨리스라는 존재, 인간이라는 존재는 시간의 한계성에 갇히게 된다.
붉은 여왕 '자! 여기에서는 보다시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 밖에 없단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으면, 최소한 두배는 더 빨리 뛰어야 해!"
거울 나라의 통치자 붉은 여왕은 원더랜드의 하트의 여왕과는 사뭇 다르다. 붉은 여왕은 분노를 가지고 있지만 교양이 있고 차가우며 전략적이다. 그녀의 세상은 바로 체스판이다. 체스판은 수없이 많은 말들이 서로를 잡지 않으면 잡지 못하면 죽는 게임이다. 붉은 여왕이 말한 이 이야기는 붉은 여왕 효과로 경영이나 경제 쪽에서 많이 쓰이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단계를 한번 더 높여서 생각해보면 앨리스의 반대 되는 인물은 바로 붉은 여왕이다. 이 꿈은 앨리스의 꿈이다. 재밌는 점은 거울 나라가 앨리스의 꿈이지만 앨리스는 체스판에서 제일 지위가 낮은 폰(졸)으로 나타나게 된다. 앨리스에게 있어서 붉은 여왕은 앨리스가 정복해야 하는 대상이다. 붉은 여왕은 앨리스의 다른 얼굴이다. 거울 나라에서 지배자는 바로 여왕이다. 하지만 이미 앨리스의 꿈 속에서는 이미 결과는 나와 있었다. 언젠가 붉은 여왕은 앨리스에게 패배할 것이었다. 앨리스와 붉은 여왕의 체스 게임에서 붉은 여왕은 앨리스를 이기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앨리스의 목적 즉 현실적인 자아와 내면 속의 자아와의 화해를 방해하고 그 계획이 영원히 이루어 지지 않게 하는 것이 여왕의 목적이다. 앨리스에게 있어서는 붉은 여왕을 이겨야 정신적으로 한 단계 도약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려고 한다. 이런 붉은 여왕과의 체스 게임이서 우리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겼다고 붉은 여왕과의 체스 게임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게임에서 졌다고 영원히 패배한 것도 아니다. 이런 체스 게임은 우리의 정체성의 성숙을 위해 필요한 단계이다.
하얀 기사 "언덕을 내려가서 작은 개울을 건너, 그러면 너는 여왕이 되는 거야 하지만 먼저 나를 배웅해 주렴"
내가 주석을 보니 하얀 기사는 루이스 캐럴의 화신이라고 한다. 루이스 캐럴은 점점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어른이 되어가는 앨리스를 보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 속에서 정체성에 대한 싸움은 어른이 되어가는 증거이다. 아마 루이스 캐럴은 이제 어린 아이인 앨리스와 작별을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가 이 동화를 앨리스와 독자들을 위해 썼겠지만 이 동화는 궁극적으로 루이스 캐럴 자신을 위한 선물이기도 하다. 앨리스라는 소녀는 현실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점점 변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루이스 캐럴에게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앨리스를 동화 속에서 살아 숨쉬게 한 것이다. 동화 속에서 앨리스라는 소녀는 영원히 소녀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 왕자가 조종사와의 관계가 영원하기 위해 별로 떠난 것처럼 이 동화 속에서 숨쉬는 앨리스를 통해 루이스 캐럴은 앨리스를 회상하며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앨리스 "이렇게 빨리 여왕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앨리스는 붉은 여왕을 잡고 여왕이 된다. 이것은 앨리스의 초월을 보여준다. 현실에 있는 앨리스가 바로 이상적인 앨리스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영원한 언어의 존재도 되지 못하고 시간의 사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수없이 부족하며 완벽하지 못하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어를 통해 삶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죽음을 기다리며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추운 겨울과 죽음의 이미지를 풍기는 거울 나라에서 앨리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런 과정은 앨리스가 점점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왕이 되어도 우리 내면 속에서 새로운 자아가 나타나 갈등을 빚을 수 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우리는 고민을 해야하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이는데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 너무나 어렵고 난관에 부딛혔지만 어른이 읽기에도 이 동화는 너무나 중요하다. 어린이들은 이 동화를 읽으며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되며 어른들은 이 동화를 통해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화의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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