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나메나 Dec 29. 2020

주점에서의 피로연

 모든 악몽은 주점에서 시작됐다. 마찬가지로 모든 행복은 주점에서 시작했다. 내 말은, 주점에서 시작된 행복은 시한부 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난다. 같이 술을 마신다. 이런 것은 마치 라면을 끓이려고 물을 뎁히는 것과 같아서, 목적이 분명한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라면을 완전히 먹어치우기 전까지 너무나 많은 애로사항이 생기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는 남녀가 만나서 도달할 최종 목적지는 백년해로다. 나는 그것을 아직 해본 적이 없으니, 아직 꼬들꼬들한 라면은 커녕 불어터진 라면 하나 먹어보지 못했다. 나는 입맛이 상당히 까다로워 라면이 불면 절대 먹지 않았던 적도 있다. 그러니까, 내 연애는, 내 주점에서 생긴 행복은 항상 불어터졌던 것이다. 그리고 악몽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백년해로는 커녕 상대방의 생일에 안부도 묻지 못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악몽은 나에게서 시작됐다. 아니, 나는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편했다. 사랑을 하면, 잘잘못이 서로에게 가치 매겨지지만, 나는 나를 폄하하는데 주력했다. 한 친구는 누나를 좋아하는 나를 두고 내가 "자신을 약자로 만들려는 구석이 있어요." 라고 평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나를 혐오한다는데서 기인한다. 곱추의 사랑은 그 대상을 더욱 신화화시키는 방식이 될 것이 뻔하지 않는가? 내게 내 연인들은 올림푸스에 거주했다. 나보다 뛰어났건, 매력이 있건, 무엇이던 나는 그들을 칭송했다. 나를 구원해줄 대상으로 여겼다. 좋지 않다. 흔히들 "나를 파멸시키려 하는 나의 구원자" 라고 얘기를 하는데, 나를 세우지 못하고 타인에 의한 구원만 원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실제로 나는 절벽에서 담배를 펴봤더랬다.


 그럼 이번에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야 하는가? 그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결론은, 역시나, 지금도, "내가 잘하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타당해 보이는데, 어쩌겠는가? 이번에 만난 내 여자친구는, 내가 지금까지 착각했던 거짓 메시아랑은 다른 존재다. "나를 파멸시키지 않을 나의 구원자"인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바보같이 나를 폄하한다. 나를 약자로 둔다. 지원이를 신화화한다. 나를 세우는 일을 소극적으로 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순순한 양이 될테다. 이것은 이를테면 양치기 소년 같은 것이다. 내 양치기 소년은 22세 내 첫사랑 이후로 "구원자가 왔어요~ 구원자가 왔어요~" 말하고, 나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것을 확인하지만, 번번히 거짓 아닌 허상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2년째 내 양치기 소년은 "구원자가 왔어요~ 이번엔 진짜 구원자가 왔어요~"라고 말하는 중이다. 나는 한번만 더 속을 셈이다. 지원이, 지원이가 내 구원자다. 그리고 나는 약자가 되지 않을테다. 나를 혐오하지도 않을테다. 나를 파멸시키려 한다? 해보라지. 나는 지원이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한다. 22세 의 첫사랑 이후로 나는 강해졌다. 앞으로는 더 강해질 작심이다. 지원이와 백년해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징글맞았던 주점에서 피로연을 올릴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여전히 Blu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