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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May 14. 2018

불안 - 2

  불안에 대한 내 글 타래를 하나 하나 늘려나가고 싶다. 첫 글에서 말했다시피 불안은 내 가장 큰 적이자, 가장 큰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적이면 적인대로 마주해야만 하고, 동반자라면 동반자인 대로 그를 어르고 달래야한다. 사실 이 불안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는 내 강박은 매우 커서 나의 20대 글쓰기의 대부분을 불안을 글로 써내려가는 행위에 골몰했다. 사랑을 얘기해도, 이별을 얘기해도 모든 음절, 어절, 단락은 불안으로 귀결됐다. 이것은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필연적인 듯 싶다. 나는 내 곁의 적에 끔찍하게 진저리치며  동반자에 무한한 애정을 느끼는 사람이기에, 나는 내 감정을 글로 써내려가고 싶기에 불가피하며 불가항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난 내 불멸의 적과 끊임 없이 싸워왔다. 주로 약을 통해, 그리고 여러가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행위들로 말이다. 병원의 교수님은 그저 온화하게 여러가지 행위를 말한다. 운동해라, 규칙적인 생활을 해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어라. 하지만 내가 가장 주력하는 행위는 그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은 한번도 그 행위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다. 내가 말하는 그 행위는 바로 글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멋들어지게 말할 만큼 글을 많이 쓰진 않았다. 하지만 말했듯이 내가 글을 쓸 때 만큼은 항상 불안에 대항하기 위한 헛된 저항을 노력했다. 나는 공황발작으로 강남 세브란스 병원에 실려 갔을 때, 신경안정제를 5알 먹고 집에 와서도 잠이 안왔을 때, 집에서 글을 썼다. 사실 그 때 발작은 약간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이 있어서, 그거에 관해 글을 썼고 다음날 일어나 그 글에 상당히 만족했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보면 약물과 불안에 기대 좋은 글을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 내 맘이 한결 편해진 것은 사실이니, 내 저항이 그리 헛되진 않은 모양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정확히 말하면 왜 불안에 대해 글을 쓰는가, 저항하기 위해라는 말을 썼지만, 어쩌면 불안을 껴안고, 감내하기 위해 이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인지 불안에 대해 글을 쓸 때는 나의 상태에 대해 순순히 인정을 하는 느낌이다. 평소에도 인정은 하지만, 억울함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글을 쓸 때만은, 말그대로 불안을 껴안게 된다. 아마 그것은 나의 이 부정할 수 없는 기질을 담담하게 받아 들이고, 그것을 표현하므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나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며 나를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든다.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라니, 꽤 보람찬 일이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쓰며 나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며 희열을 느낀다.

   불안이란 불멸의 적을 필멸의 존재인 내가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보통 '보통의 존재들' 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만큼의 불안 정도로 약화시킬 순 없을까? 사실 이는 매우 오만한 생각이다. 내가 말하는 보통의 존재들이 느끼는 불안을 평가절하하는 것도 그러하며, 불안이란 이 무지막지한 녀석을 쉽게 보는 것도 그러하다. 적어도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혀 온 작자를 물리치려 그동안 내가 쓴 글이 얼마나 될까? 내가 삼킨 약의 갯수가 얼마나 될까? 내가 믿어온, 나의 불안을 해소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존재를 얼마나 잃어 왔던가? 나는 평생 헛된 저항을 하며 살지도 모르겠다. 이 저항은, 그리고 이 적은 매우 은밀해서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더 글에 집착한다. 익명으로 그저 글을 쓰며 아무도 읽어 주지 않는 글에 내 자신을 바친다. 

  나도 안다. 결국은 나는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최악의 상황에는, 이 불안이 나를 절벽에서 밀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꽤 자주 절벽에 서왔다. 이것은 마냥 레토리컬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불안은 아직 나를 완전히 나락으로, 죽음의 심연으로 떨어뜨리지 않았다. 7년동안 불안과 나는 적당한 밀당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나를 압박하며, 사지로 몰고가면서도 나를 끝내 끝내지는 못하였다. 아니 못한다기보다, 그러지 않으려는 것은 아닐까? 이쯤 되면 내 곁에 있는 불안이 하나의 인격체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내가 적이자 동반자라 묘사를 했으니, 이미 은연중에 나는 그것이 인격을 가진 존재라고 인정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사람은 나와 가장 밀접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의 평생의 원수이며, 평생의 룸메이트이다. 나는 그저 '원수도 사랑하라'라는 말을 되내이며 그가 나를 밀어 떨어트리지만, 나를 영원한 해방으로 이끌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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