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나메나 Jan 12. 2020

김이 서린다.

 그녀에게 사랑한다 말했다. "거짓말이지?" 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당연히 거짓말이지."라고 말한다. 깔깔 웃는 우리. 웃음을 다 멈춘  순간 나는 다시 사랑한다 말한다. 그녀는 말이 없다. 나는 눈치를 살핀다. 고백은 아니었다. 하룻밤을 위한 가식은 더더욱 아니었다. 진심이었을까?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 해야하는 것일까? 아마 '그래야 할 때' 일 것이다. 그래야 할 때라...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사랑한다 말해야한다. 그래야만 한다. 나는 그런 성격의 사랑한단 말을 그리 많이 한 적이 없다. 대신, 상대방의 눈을 볼 때, 나는 알 수 있다.  그 때를,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렇게 오랜 친구에게 사랑한다 말했다.


 해후다. 학교 근처의 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우연히 그녀를 봤다. 오랜 친구란 말이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붙어다니다가 어느새 2년째 습관적인 안부를 묻는 것이 다였다. 내가 번호를 바꾼 후에는 그것조차 끊겼다. 그녀는 지금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때를 느꼈다. 같이 자리를 하고 있던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에게 간다. 그녀도 친구에게 양해를 구한다. 왜 그랬을까? 둘 다 조금 술에 취한 상태였다. 같이 담배를 피며 안부를 물었다. 습관적인 대화. "담배 끊었다며?" 나는 사는게 팍팍해 다시 피운다고 너스레를 떤다. 담배를 턴다. 나는 막걸리라도 마시러가자고 말한다.


 "옛날 여기서 담배도 피우고 그랬는데..." 학교 주변 먹자골목 후미진 곳에 있는 어떤 막걸리 집에서 우리는 옛이야기를 한다. 누구가 결혼을 했다고, 누구는 영화를 한다고. "너는 뭐해?" 나는 그냥, 기다린다 말한다. 기다리는 일에 지쳤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헤어졌고, 그냥 방황한다 말한다. 여자나 쫓아다닌다고. 그 와중에 소중한 사람들마저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돈도 벌지 않고, 없는 일도 만들어 걱정한다고. 그녀는 더이상 기다리지말고 쟁취해내라고 뻔한 충고를 한다. 나는 말 없이 웃는다. 그녀의 일장연설이 시작된다. 조금 고지식한 그녀는 나에게 걱정어린 조언을 건넨다. 나는 조금 듣기가 싫어지지만, 그래도 따듯한 마음을 느낀다. 질투 또한 덤으로 다가온다. 건실한 직장에 다니는, 그녀는 옷차림도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아직도 후줄근하다. 이러면 어떨까, 오랜 친구에게 선물로 내가 가진 불안을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


 둘다 술에 취했지만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 반면에 그녀는 갑자기 하소연이다. 일이 힘들다고, 사회 생활, 인간 관계에 지친다고 그녀는 넋두리다. 내가 몰랐던 새로운 남자친구와의 미래는 답보 상태이고 나에게 굳이 보여줄 필요 없는 여러가지를 나에게 말한다. 흔히 있는 전개, 자신의 문제적 상황, 과거를 얘기하며 그녀는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연다. 그녀의 말들에 어떤 의도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없던 의도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화장실에 갔다 돌아와 그녀의 옆자리에 앉는다. 내가 기대기도 전, 그녀가 나에게 기댄다. 나를 내 것이 아닌 이름으로 부른다. 과거 같이 몰려 다니던 우리의 또 다른 친구였다. 나는 후회한다. 


 자리를 일어나 골목들을 헤쳐간다. 골목들은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가끔가다 추워 종종 걸음을 치는 사람들을 만난다. 손은 잡지 않지만, 우리는 딱 붙어 있다. 그녀는 갑자기 의도가 생긴 듯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더이상 감정의 과잉을 선물하고 싶지가 않다.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둘 다 소중한 친구였다. 자제하자고 다짐하고, 그녀에게 집이 어디냐 묻는다. 뻔하게도 그녀는 집에 가기 싫다고 말한다. 나는 담배를 핀다. 욕구 따위 같은 것은 없다. 갑자기 떠오른다. "푸하하", 웃음이 나온다. 옛날 그녀는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했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남자친구가 있다고, 미안하다며 나에게 완곡한 거절을 했었다. 옛날 모임의 뒷풀이 자리에서 말이다. 나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사랑해", "안아주지 않을래?" 그녀는 나를 안아주며 내 목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친구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묘한 기분이 되어, 목덜미를 만졌더랬다.


 2차를 가자 자꾸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나는 사랑한다 말한다. 계속 사랑해왔다고. 나에게 완곡한 거절을 해주라고. 친구는 나에게 안긴다. 그리고 나의 목덜미에 키스를 했다. "집에 데려다줄게." 그녀가 말한다. 나는 웃으며 승낙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택시를 탔다. 짓눈깨비가 내리던 그날 밤, 차의 창에는 습기로 가득차다. 그녀는 그곳에 입김을 불더니 하트를 그린다. 나를 돌아본다. 눈빛이 묘하다. 나는 손을 뻗어 창문을 내린다. "아직도 거기 살아?", "응". 나는 택시 기사에게 방향을 정정한다. 그녀는 춥다고 툴툴거리며 창문을 올린다. 그리고 다시 입김을 분다. 나는 거칠게 그녀의 손가락을 잡아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다.


 나는 내 쪽 창을 너머 밖을 바라본다. 굽이진 골목 골목을 몇번이고 돈다. 그녀를 내려주고, 택시 기사에게 내 집으로 가달라 말한다. 그는 거리가 너무 멀어 못간다며 다른 차를 잡아타라 말한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차 문을 닫고 나온다. 그녀의 빌라 아래다. 이미 집에 들어간 그녀는 내 기억으론 1층에 산다. 창살이 쳐지고 불이 꺼진 창문에 입김을 불어본다. 그리고는, 내 번호를 쓴다.


 다시 택시를 잡아타 집에 간다. 취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강변을 보며 창문을 살짝 열어놓는다. 창문을 닫아달라는 기사의 부탁에 나는 창을 올린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 탓에 부드러운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한다. 온도차로 인해 김이 많이 서려 밖이 안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나는 그릴 것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love letter to you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