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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Feb 14. 2018

불안 - 1

  사람을 두 분류로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런 일 만큼 재밌는게 또 없어서 어쩌나 저쩌나 많이 하게된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vs 음악을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 이렇게 가르다 보면 생각이 편협해지기 쉽상이다. 심지어 우리는 자기중심적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이런 종류의 발화를 하는 사람도 결국 두 분류 중에 하나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그러듯이  자기 존재를 긍정적인 포지션에 두며 그 대척점에 있는 존재들을 깔보거나 자신의 사고에서 배제하려든다. 

  나는 항상 불안한 사람 vs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대립 구도를 만들어왔다. 물론 불안한 사람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고, 말했듯이 나는 나를 긍정한다. 그러며 불안하지 않는, 세상을 어떻게 보면 스무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무시한다. 나도 안다. 세상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불안의 종류가 다르다고 나는 생각해 나라는 존재를 스페셜하다고 생각한다. 미래나 현재, 결과에 대해 갈팡질팡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걱정을 하는 것도 불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훨씬 더 광범위하게 쓰이는 불안이란 단어의 용도일 것이며 우리 모두가 느끼는 것이라 쉬이 말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내가 이 대립구도 사이에서 정의하는 불안은 조금 다르다. 어쩌면 더 강한 마음의 고통, 사람의 실존에 대한 불안, 운명이란 거대한 괴물 앞에 한없이 작은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하찮음을 느끼는 것. 그게 내가 말하고 싶은 불안이다. 이러한 불안도 대부분의 사람이 느끼리라. 하지만 나는  이 불안 때문에 남들보다 꽤 까다로운 삶을 살고 있고, 하루에 약을 열 알을 먹으며 불안과 싸운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이런 종류의 불안을 남들보다 더 느낀다고 거칠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했듯이 나는 나를 긍정적인 포지션에 두면서 다른 분류의 사람을 까내린다. 내 관점은, "어떻게 이 거대한 고통, 불안을, 운명이란 암흑적 존재를 못느끼는 건가." 이다. 하지만 나도 안다. 그들도 느끼겠지. 하지만 뭔가 그것을 하나 하나 극복하거나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존재들이 있다. 내 주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나는 그들이 부럽다. 그래서 그들을 까내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나의 불안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느끼는 사람." 이라는 것이다. "나는 너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껴." 이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며 그 고통에 점점 탐닉한다. 나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루는 친구가 매우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맘이 예민하고 감정이 풍부한 친구인 그는 아직인지 앞으로도 인지 약은 복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내 방에 앉아있는 그는, 매우 초조해 보였다. 결정적으로, 매우 불안해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지금 기분이 어떤지 물어봤고 그는 불안해요.라고 대답했다. 사실 불안할 어떤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슬픔이 더 그 당시에는 더 적당한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불안하다는 발화를 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언제 또 이런 표현을 한 적이 있냐고. 그리고 너가 말하는 불안이 어떤 감정인지 설명해줄 수 있냐고. 하지만 그는 두 질문에 다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상태가 조금 심각하다는 생각을 했고, 내가 먹던 약 중의 적당한 것을 하나 꺼내 손에 쥐여줬다. 약을 먹은 그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에서 조금은 해방된 기색이었다. 그 후 어떠한 이유 때문에 그 친구와 잠깐 연락을 안하고 있는데, 나는 항상 걱정이다. 왜냐면 불안은, 표현할 때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며 우리를 위협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는 불안을 말해야만 한다. 그것이 위기의 시작이자, 해결책이다. 우리는 불안을 말해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꾸준히 불안에 관해 글을 써왔다. 그게 나의 오랜 적을 맞이해 싸우는 방법이자, 불안에 대한 굴복이었다. 나는 불안에 대해, 아니면 불안에서 파생된  경험 외에는 쓸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에 관해도 꾸준히 글을 써왔지만, 그것은 하나의 도피였을 뿐이다. 나는 장 그르니예와 페소아와, 카뮈와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읽으며  희열을 느꼈다. 그는 모두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불안과 격렬하게 싸워오면서 역사에 족적을 남겻다. 내가 그들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나도 불안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 내 인생에서, 나를 제일 괴롭힌, 이 지긋지긋한 친구와 마주하고 싶다. 이 친구는 나를 사지에 내몰지만, 절벽에서 등을 밀지는 않았다. 이것이 나를 끝까지 밀지 않는다면, 나는 살아있겠지. 그리고 도피하고, 마주하고, 용서를 구하겠지. 나에게 불안이란 그런 것이다. 오늘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것이 분명한 글을 쓰며 나는 나를 껴안는다. 괜찮다고, 나쁘지 않다고.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그저 저 큰 괴물의 악의는, 너가 물리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니 그저 마주하고. 겁먹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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