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의 워홀 이야기

#3 버티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야. 가끔은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해.

by 욕심많은민지

성수가 잘린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황당했다.

망고 농장일은 한 팀이 함께 움직이는 팀 작업이다.

트랙터를 운전하는 트랙터 운전수(호주인 매니저), 총 2층으로 된 트레일러에 탑승하는 픽커 열댓 명,

트랙터 뒤를 따라가면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망고를 따는 픽커 두 명으로 한 팀이 구성된다.

성수가 잘린 날, 성수는 트랙터 뒤를 따라가며 발견되지 못한 망고를 따는 마지막 픽커였다.


성수에 의하면 그 날따라 이상하게도 매니저는 망고를 다 따서 아무것도 없는 라인으로 진입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보다 망고를 채운 팔레트 수가 상당히 적었는데 사장은 팔레트 수가 적은 게 상당히 언짢았던 듯하다. 사장에게는 수확량이 곧 돈으로 직결되니 심기가 불편한 게 한 편으론 이해가 간다.

하지만 본인들이 일정을 잘못 짜서 들어갔던 라인을 또 들어가게 됐는데 일개 픽커들이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정직원인 매니저를 나무랄 순 없었는지 픽커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매니저가 아닌 픽커들에게 일 제대로 안 하냐며 다그쳤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매니저는 계속 망고가 없는 라인으로 들어가니 한 번 꾸지람을 들은 픽커들은 눈치도 보여 곤란했다고.. 성수의 포지션은 맨 뒤에서 트랙터를 따라가며 미처 못 딴 망고를 따는 일이 었으니 아마 더 그랬을 거다.

어쨌든, 망고는 없는데 사장은 자꾸 눈칫밥을 주니 성수는 본인이 맡은 일을 조금 더 꼼꼼히 해 보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앞서가는 트랙터와 거리가 멀어진 줄도 모르고 망고나무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는데 마침 사장이 뒤쳐진 성수를 본 거다.

사장 눈에는 뒤쳐진 성수가 게으름을 피운다고 생각한 걸까?

왜 뒤처져있는지 이유도 묻지 않은 채 곧장 "집으로 돌아가!"라며 성수를 그 자리에서 잘랐다고 한다.

성수가 따왔던 망고. 맛은 좋았지



성수는 엄청나게 억울해했다.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인데..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억울했을 것 같다.


이제 막 자리를 잡는가 싶었는데 상황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완전 멘붕상태에 빠졌다.


사실 우리를 힘들게 했던 건 농장일 뿐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일이 힘드니 서로의 예민함은 극에 달했고 정말 매일.. 아니 한 시간에 한 번씩 싸웠다고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의 관계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서로에게 건네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시가 돋쳐 있었고, 서로의 기분을 살필 여력이 없어서인지 자신의 기분에만 충실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남긴 상처들은 아물어질 틈 없이 계속 벌어져 곪을 대로 곪았고, 둘 사이의 깊이가 이 정도밖에 안됐던 걸까라는 생각이 지배적일 정도였다. 당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괜찮은 게 없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고, 모든 것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농장 관리자에게 며칠간 휴가를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브리즈번 근교의 선샤인 코스트로 무작정 떠났다. 어디라도 좋으니 이 곳만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적당히 먼 곳 중 아무 곳이나 가보자며 선택했던 곳이 선샤인 코스트였다.


20190113_125012-01.jpeg 선샤인코스트 김피비치


그날 밤,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떠난 여행이었기에 잘 곳이 없어 좁디좁은 차 트렁크에 거의 구겨지다시피 누워 하룻 밤을 보내고, 먹을 것을 준비 못해 패스트푸드로 대충 저녁을 때웠는데 이상하리만큼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편했다. 이 편안함은 서로에 대한 원망과 불만을 녹여냈고 심지어 서로를 화나게 했던 것들을 관대히 받아들이게 했다. 우리는 실로 오랜만에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20190112_214456-01.jpeg 무료캠핑장에서의 첫 차박

주된 내용은 지난 일은 서로 용서하고 잊어버리자는 것과 미래에 대한 고민이었다.

각자 가지고 있던 크고 작은 생각들을 끄집어 내다보니 어느새 새벽이 찾아왔다.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쯤 농장일이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를 못했던 성수가 입을 열었다.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성수의 제안에 한 편으로는 아직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탓에 우리가 너무 극단적인 결정을 쉽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내 입에서는 "그래. 그게 좋겠어. 네 생각을 따르는 게 맞을 것 같아"라는 대답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생활을 되돌아봤을 때 '단 하나라도 정답인 게 있는가'를 보면 대답은 'NO'였기 때문이다.


살면서 내가 먼저 해보겠다고 나섰던 일을 포기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농장일에 치여 힘들어하면서도 끝까지 이겨내 보겠다고 결심했던 나였다. 육체적인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동안 쉽게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관계, 정신적인 스트레스)들이 농장을 벗어난 지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쉽게 해결되는 것을 느낀 나는 이게 나의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생긴 참담한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수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서로의 관계를 망치고 내 내면을 망가뜨려가면서까지 이 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내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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