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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Aug 17. 2021

회사에서 딴짓하기 좋은 아이템

애정하는 사무용 아이템이 궁금해요

SNS를 세 개나 운영하면서도 다이어리를 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말마다 다이어리를 사서 4월 정도까지는 착실하게 쓰는 편이다. 중간은 어쩜 그리 빨리 지나가는지 뭉텅이로 비워두고 11월이 되면 다시 구매-작성 시작. 결국 쓰는 건 1년 중 5개월간 다이어리를 쓰는 셈이지만 다이어리 사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 올해는 작년과 다르다는 마음가짐, 그것의 시작이 다이어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매년 다이어리를 사면서도 한 번도 사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회사에서 사용하는 크고 볼품없는 업무수첩!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두껍고 폭신폭신한 재질의 커버에 2021이라고 적혀 있는 수첩. 솔직히 업무에 대해 적을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간간히 숙지해야 할 내용이 있긴 해서 증정용이긴 해도 나만의 예쁜 수첩을 쓰고 있었다. 최소한 스타벅스 다이어리라도 되어야 삭막한 내 책상과 업무에 활력을 준다고 생각했기에 Monthly나 Weekly 날짜 상관하지 않고 예쁜 수첩을 찾아 쓰던 나였다. 특별한 것도 없는 회의에 늘 커다란 업무수첩을 손에 들고 참석하는 상사들을 보면 회의에 참여하기 전부터 피곤해졌다. 다 같은 수첩에 비슷한 옷차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 표정. 그들의 손에 쥔 업무수첩은 적장에 나가는 장군들의 갑옷 같이 처연하게 여겨지기도 했고 거추장스러운 장식같이 여겨지기도 했다. 업무수첩은 내게 그런 물건이었다.


복직 전, 회사로 돌아가면 바로 회사 인간이 될 것 같아 평일도 내 삶의 한 부분임을 놓치지 말고 무엇이든 기록하려는 마음에 필사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3만 원 상당의 필사 세트도 제공해 준다니 서정적인 문구류를 기대했는데 3P 바인더 수첩 같은 커다란 20공 바인더 수첩이 왔다. 너무 커서 절대 들고 다닐 수 없는, 내가 절대로 쓰지 않는 업무수첩 같은. '음 그래. 어차피 출근 전이나 출근 후에 집에서 쓸 거니까 수첩 모양은 상관없지' 하며 출근 전 커다란 수첩에 내가 읽은 책 필사를 하고 내 글을 적었다. 그러다 점점 긴장이 녹아들며 늦게 일어나기 시작한 나는 출근 전 필사할 시간이 사라져 바인더 수첩을 회사로 가져왔다. 나만의 시간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일찍 출근하면 필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 시간을 사수하기 위해 모닝커피를 혼자 마시고 싶다 생각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https://brunch.co.kr/@mintblue918/126




내 시간을 사수하고 싶은 마음에 필사 노트를 내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것의 모양이 운명처럼 업무수첩과 비슷함을 발견했다. 무엇을 적고 있어도 업무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유전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기쁜 마음이 들었다. 빠르게 필사할 내용을 적고 업무 중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다. 빼앗긴 아침의 커피는 업무수첩 모양을 띈 필사 노트로 되찾게 된 것이다. 아기자기 예쁜 모양의 수첩이었다면 무슨 일기를 쓰나 하고 다른 직원들이 힐끗거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프로젝트 리스트도 있고 리마인더 리스트도 있는 업무수첩이었다. 크기나 모양이나 완벽했다. 미친 듯이 바쁘지 않는 한 나는 회사에서 내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는 필사 수첩을 늘 펼치게 되었다. 사실 필사 수첩에 업무내용을 적기도 한다. 이 수첩 저 수첩 왔다 갔다 하기 번거로워 뒷장에는 통화 중 적은 메모가 가득하다. 비록 업무내용이 혼재되어 있긴 하지만 내 마음이 정성스럽게 빼곡히 담긴 이 수첩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앞부분 먼슬리와 위클리를 뺀 뒷 부분엔 이렇게 무지노트로 필사와 자유메모가 가능하다.


다른 사람들의 책상은 어떤 물건으로 채워져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생각보다 아기자기한 편이 못돼서 예쁜 문구류를 가져다 놓거나 가족사진을 붙여놓거나 하진 않는다. 그래도 하루 9시간 이상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 삭막하게 남의 공간인 듯 앉아 있다 가는 것은 싫었다. 내가 쓰는 향수나 텀블러도 가져다 두었지만 가장 맘에 드는 것은 필사 수첩이다. 요즘 나의 관심과 사유와 감정이 남김없이 적혀 있는 수첩. 직장인이라는 캐릭터로 회사에 앉아 있지만 나라는 존재의 사유그대로 담긴 수첩이 함께 있으니 든든하다. 상처를 받거나 힘들어지면 곧바로 수첩에 적으면 괜찮아질 것 같은 마음까지. 


아, 하지만 필사 노트는 그저 생각을 기록하는 수첩이라 매년 다이어리 사는 것은 여전히 계속되는 나의 의식이다. 엄연히 다른 목적의 노트들.

이쯤 되면 나는 기록 집착녀인가 싶지만 그저 내 삶을 지독히 사랑하는 한 사람인 걸로 이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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