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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Aug 03. 2020

그래서 무엇하냐면,

황정은 작가의 산문 '일기'를 읽고

어느 날엔 문득 용기가 사라지고 그런 날엔 소설도 일기도 쓸 수 없다. 그럴 땐 음악의 도움을 받는다. 다른 사람이 애써 만들어낸 것으로 내 삶을 구한다. 음악 한곡을 여덟 번 열 번 반복해 듣는 것이 어떻게 삶을 구할 수 있기까지 하느냐고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두 형사, 그레이스와 캐런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마리의 삶을 본인들의 일로 돕는다. 누군가의 애쓰는 삶이 멀리 떨어진 누군가를 구한다.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며, 픽션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타인의 애쓰는 삶은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지난 몇 달 동안 그것을 생각했다. 미국의 빈곤과 인도의 빈곤과 싱가포르의 이주 노동자를 향한 배제와 유럽과 호주의 아시안 혐오와 미국의 파렴치한 정치와 일본의 정치적 무능은 이런 식으로 국경을 넘어 내 일상과 연결되고 만다는 것도.
( 창비에 실린 황정은 작가의 산문 '일기'p436)





한 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다면 단박에 말할 수 없는 것도 있고 페미니스트가 된 것처럼 열변을 토할 수도 있는 요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복합적이어서 그리고 어쩌면 비합리적이어서, 비생산적이어서, 따지고 드는 게 비효율적이어서 나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글을 쓰고 싶어 졌다. 내게 글이란 어떤 날은 내리 열 편을 쓸 수 있을 것도 같고 어떤 날은(사실 거의 모든 날) 아무 써야 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게 어떤 목소리나 절박함이 없어서 그렇다는 생각을 했는데 요 며칠 글이 다시 쓰고 싶어 졌던 걸 보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계간지 창비도 몰아서 보기 시작했다.

문예지를 읽으면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다. 황정은 작가님의 산문이 실려있다니. 반갑게 후루룩 읽었다.

후루룩 읽었더니 내게 걸러지는 문장이 없어 다시 읽었다.

씨앗 문장을 찾아야지 하고.

그리고 생각났다.


어젠가? 독서모임을 통해 알게 된 언니가 '이런 독서모임도 있네?' 하면서 링크를 보내왔다. 이런 모임이고 저런 모임이고 책을 좋아하지만 자꾸 관계를 넓히고 싶지는 않아서 창을 열어보고 빽빽한 글에 그냥 X를 눌러 닫았다. 그래도 나를 생각해서 보내왔다는 것은 뭔가 의미가 있지 않겠나 싶어서 여러 번 들락날락했다. 아니 별로야. 나는 새로운 모임에 합류하고 싶지 않아. 책이 너무 어려워, 온라인은 싫어 뭐 이러면서도 계속 그 창을 열고 닫고 하다 '아니 이 언니는 이런 모임에 참여해서, 이런 어려운 책을 읽어서 도대체 어디다 쓰려는 거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언니에게 물어보려다 왠지 언니가 머쓱해하며 혼자 물음표를 그릴 모습이 상상되어 말았다. 시도도 하지 않고 그래서 무엇하게?라는 물음은 그 옛날 여자가 공부해서 뭐하게?라는 물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도전을 비웃는 물음이었다. 나는 결국 그 모임이 소개된 블로그 닉네임 옆에 이웃추가 버튼을 꾹 눌렀다.


어느 날은 나와 연결된 모든 것에 관심이 생기고 어느 날은 나 이외의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가지 않는 날이 서로 반복된다. 그 두 사람 모두 나인데 오늘은 어떤 이가 나를 다정하다 했고 어떤 이는 나에게 나외의 것에는 가치를 두지 않냐고 물었다. 참 재밌다. 나는 그 두 자아를 왔다 갔다 하며 관심을 모았다가 흩었다가 좋게 말하자면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인데 책을 읽는 것, 그중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이 또 하나의 균형을 이루는 방법이 되겠다. 내가 관심 두지 않는 것에서 관심을 두도록 끌고 가는 방법 말이다.


그래서 무엇하냐면,

누군가의 애쓰는 삶을 통해 내 삶을 비췄다면

나 역시 이런 애씀을 통해 누군가의 삶에 빛이 돼주고 싶은 것.


황정은 작가님의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책도 그랬다. 딱하고 어려운 생활 배경의 주인공들의 삶이 안쓰러우면서도 내가 그들을 마냥 동정할만한 처지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담담하게 이어가는 한 마디는 울음을 삼키는 말로 들려서 듣고 싶지 않았다. 뭘 계속하겠다는 거야? 힘들고 슬픈 삶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거야? 답답했다. 그런데 나도 내 일상의 오르내림을 겪으며 어쩐지 자꾸 저 말을 되뇌게 됐다. 복직을 하게 되면 나도 남들과 비슷하게 현재 삶에 만족하며 정신없이 보통의 삶을 살겠지 하는 체념을 자꾸 하면서 그 끝에 저 문장을 붙였다. 어쩐지 다시 맥없이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 마음을 다시 다잡는 의미로 하게 됐던 것 같다.

어찌 됐든 내가 하는 아주 작은 노력들을 계속해보겠다고.


타인의 애쓰는 삶을 보며

아이고 애쓴다 애써.라고 한마디 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기록을 하고 자꾸 질문을 하면 나도 애쓰는 방향이 된다. 황정은 작가님도 그렇게 애씀을 통해 글을 쓰시겠지.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서로 애쓰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지지부진한 애씀을 응원하고 격려하고 싶다.


그래서 무엇하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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