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아한밍블 Dec 12. 2020

눈송이의 무게, 나의 겨울방학

어린 시절의 겨울방학이 생각나는 '겨울방학'을 읽고


책을 읽고 나면 꼭 좋았던 문장을 다시 한번 적어 보는 게 좋다. 그리고 리뷰를 쓰면 더 좋다. 물론 나도 그러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요즘은 두 가지를 꼭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휘리릭 지나갔던 문장을 다시 보는 것은 텍스트로만 존재했던 글을 내 삶으로 맞이하는 것과 같다. 소설은 있을 법한 이야기니까. 내 삶에도 있을 법한 이야기였고, 틀림없이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이 책에 나온 이야기 역시 그렇다. 속마음으로만 이뤄진 문장이 너무 많아서 좀 무겁기도 했고 이렇게 자세히 내가 그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좋았던 문장을 다시 보니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돌담의 장미루와 똑같이 나는 '동굴'이라고 이름 지은 바위와 바위틈 사이에 쓰레기 같은 보물을 넣어두었다. 정확히 그것은 쓰레기였지만 나는 '보물'로 여기고 정확히 장미루처럼 수첩에 목록을 적었다. 그 모습이 장미루처럼 품격이 느껴졌을 리가 없지만 솔직히 나 스스로는 좀 그런 특별함을 느끼긴 했다. 어쩜.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감정을 느끼다니. 어린 시절은 다들 그런 것일까? 그 보물들은 몇 날은 그대로 있었지만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다. 사라진 걸 발견했을 때 나는 매우 황망했지만 또 쉽게 잊었다. 그런 어린 시절이 있었다. 장미루 같은 친구도 없이 나는 혼자 그렇게 보물을 넣어두고 기억하고 그랬지만 외롭지 않았다. 아니 그게 외로웠던 기억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외로움'의 감정을 몰랐으니까.



소설을 읽으면 이렇게 갑자기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전혀 큰 사건이 아녔던 일들이 내 감성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구나 새삼 알게 된다. 그것이 반갑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0'에서 주인공이 말하듯이 '생각지도 못한 많은 것을 잃거나 잊어 가며 살고 있는 게 분명한데... 막상 알게 되어 신경 쓰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어느 때는.



그래도 가끔 나의 절반을 이루고 있던 것, 아마 과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을 찾아 나서고 싶다. 그것이 나였으니까. '겨울방학'의 이나 역시 그랬다. 가난을 모르고 자랐으니 신발장이 없는 현관이 이해가 안 갔고 아파트에 살지 않는 고모가 이해되지 않아서 자기 편한 대로 말하는 이나를 못됐다고 나는 말할 수 없었다. 플라스틱 선반을 살 게 아니라 푸르지오 아파트를 사라고 하는 이나의 무관념이 혀를 찰 지경이지만 고모는 상처 받기보다는 자신의 가난을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도 어린 시절 아무 말이나 하던 때가 있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이유로 시골 사는 아이들을 무시했던 때가 있었고 그 시절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다시 어떻게 되돌릴 수가 없으니 더 쩔쩔매어지는 감정이 있다. 왜 그랬을까? 그것도 외로워서 그랬을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성악설이 분명하다 싶다. 이나는 고모의 가난을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고모가 삶을 꾸려가는 의연한 태도,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어디서도 보지 못한 삶의 태도를 배우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의 나는 자라서 내가 됐다.

어릴 땐 어른이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질 줄 알았다. 물론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생각의 크기는 생각보다 커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 생각한 것과 비슷하게 자라났을 뿐 대단한 생각이 피어나진 않았다. 불확실한 것이 더 많아졌고 모르겠는 것들이 더 많아졌다. 오히려 답을 알 것 같은 사람(나)에게 질문하는 아이를 통해 배우는 것이 더 많은 요즘이다. '어느 날(feat. 돌멩이)'의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처럼.


근데 이해를 하면 또 이해가 안 되는 게 생긴다. 우선 우주한테는 네가 미세 먼지인지 몰라도 나한테는 네가 미세 먼지가 아니야. 나도 미세 먼지가 아니다. 그리고 너나 나나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고 분명히 있어. 또 네 말처럼 우리가 아무리 미세 먼지 같은 그런 존재라고 해도 나는 우리가 사라지는 게 아쉽고 슬프다.(p228)


그리고 그 거대하고 대단한 우주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어떤 것을 위해 달려가나 생각했을 때 참 별거 아닌 것이 남는다고 생각되는 날엔 피식 웃음이 나는 것이다.


손님을 기다리나 싶은데 막상 손님이 오면 손님을 기다렸던 건 아닌 것 같거든. 퇴근하길 기다리나 싶은데 막상 퇴근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월급을 기다리나 싶어도 월급을 타면 또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고. 뭔지 모르겠어. 뭘 기다리는지. 근데 기다리긴 한단 말이에요.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도저히 모르겠다 싶을 때 내가 뭘 하느냐면.(...) 커피를 내리죠. 원두 20그램을 2분 동안 200밀리리터 딱 맞춰서 아주 정성스럽게.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향과 맛 다 느끼면서 천천히 한잔 마시다 보면 내가 이 순간을 기다렸나 싶기도 하고.(오늘의 커피, p261)


미세먼지 같이 아무 존재도 아닌 내가 누군가를 돌보고,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힘에 부칠 때 나와 똑같이 애쓰는 사람들을 만나며 힘을 얻는 것. 그리고 둘 사이에 따뜻한 커피가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것. 행복이 뭐냐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빠지지 않는 것이 이런 것이다.


겨울방학.


흰 눈이 소복소복 언제 쌓이나 지루하게 풍경을 바라볼 때가 있다.

아무 영향도 주지 않을 것처럼 내려오는 눈송이의 무게는 잴 수 없으니 쉬이 여겨진다.

그런데 그 가벼운 눈송이는 쌓이고 쌓여 무게를 갖고 긴 겨울은 다가올수록 깊어지고 멀어진다.

나의 시간도 그렇게 쌓이고 있다 믿는다.


작가의 이전글 마지막 기회가 오고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