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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Aug 20. 2019

육아의 팔 할은 어린이집

독박육아 도치맘 에세이

두 돌 전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못해도 두 돌까지는 내가 집에서 데리고 있겠다고, 아무리 못해도 돌까지는 모유수유를 할 거라고 고집을 부리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이게 내가 지금 이 아기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우연한 기회에 만 12개월 영유아 심리 발달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아이에게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나긋나긋하게, 모유수유와 애착육아를 하며 키웠으니까 당연히 애착이 잘 이루어졌다고 할 줄 알았는데 결과는 처참했다. 아이는 불안정 분노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엄마의 우울과 스트레스의 정도가 극심하니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코멘트가 달렸다. 너무나 공신력 있는 기관이었던지라 무어라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보고서에서는 하루 단 한두 시간이라도 아이를 집안 어른께 부탁드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것을 권했으나, 내게는 도움을 받을 양가 어른이 안 계셨다.


세상에 내가 애를 어떻게 키웠는데..!

육아 한 번 잘 해보겠다고 내가 읽어댄 책이 얼만데!

(나중에야 깨달았다. 육아서에는 엄마의 의무와 책임만 있지 엄마 그 자신은 없다는걸.)

이게 말이 되냐며 동갑내기 아이를 키우는 동갑내기 동네 친구에게 하소연을 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내게 너무 그렇게 애쓰지 말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라는 조언을 했다. 자기 아이를 보내 놓고 보니 그곳은 생각보다 좋은 곳이더라고.

아기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내가 살아야 할 것 같았다. 너무 어릴 때 기관  생활을 시작하는 것 아니냐며 방어적 태세를 취하는 남편을 설득하는데도 시간이 상당히 소요됐다.

그렇게 우리 아이는 만 16개월에 처음으로 기관 생활을 시작했다.


16개월. 등원 첫 날.


기왕이면 시설 좋은 국공립 어린이집에 보내는 게 어떨까 싶었지만, 집 가까이에 있는 시립어린이집을 견학 다녀오면서 그 마음은 접었다. 아직 자기 이름도 제대로 말 못 하는 우리 아이가 있기에는 너무나 큰 곳이었다. 언니 오빠 친구 동생, 정말 많은 아이들이 그 큰 곳에서 생활을 하는 건데,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우리 아이가 혹여 방 밖으로 나가면 이 아이가 어느반 누구인지 누군가는 모를 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예전부터 좋은 곳이라고 이야기를 들어왔던, 사실 아이를 낳고도 일을 계속할 줄 알고 미리 알아봤었던 그 영아전담 어린이집으로 마음을 굳혔다.


좋은 어린이집.

우리는 그렇게 좋은 어린이집을 만났다.

우리 부부가 생각한 좋은 어린이집의 요건은 간단했다. 깨끗하고 밥 잘 나오고, 선생님이 따듯하고, 아이가 집처럼 편하고 안전하게 있을 수 있으며 자연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곳.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되도록 재정이 안정적인 곳.

이게 우리 부부가 따져본 것들이었다.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의 마인드가 동일하게 직업의식이 투철하시다고 가정한다면, 재정이 안정적일수록 아이들 먹거리에 쓸 자금적 여유가 높아진다.

정말 감사하게도 이런 곳을 만날 수 있었다.

부채 없이 주택 한 채가 원장님 소유로 한 자리에서 20년 넘게 운영중인 곳이었다. 원장 선생님의 정보력의 힘인지는 몰라도 예산 지원도 이리저리 많이 받아서 선생님들의 처우도 좋은편이라고 했다.

오분도 현미를 늘 농협에서 주문해 먹이고 유기농 식재료만 쓴다는게 원장 선생님의 자랑인 곳, 그 곳레서 우리 딸은 밥 많이 먹고 청계산을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캐릭터를 얻었다.


어린이집에 감사 나온 분들이 무슨 애한테 밥을 이렇게 많이 주느냐고 타박을 했다가 그 밥을 다 먹고도 또 식판 한가득 받아 더 먹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류의 우리 딸 뒷 이야기는 사실 어린이집 적응기간이라 그 자리에 있었던 엄마들을 통해 심심치 않게 전해 들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이의 첫 어린이집은 나에게 있어 친정보다 더 좋은 곳이었다. 아이 아빠의 말을 빌리자면 가족 같은 곳이었고, 우리 부부의 양육에 있어 팔 할 그 이상은 어린이집이었다.

아이와 함께 지나온 지난 45개월은, 뭐랄까 거대한 폭풍이 쉴 새 없이 몰아치던 나날이었다.

친정아버지의 병환이 심상치 않았다. 그 와중에 의료사고를 당하셨다. 엄마 혼자 병간호를 하시기엔 역부족이었고, 평생 엄마의 간호만 받아오신 분이라 간병인을 붙일 수도 없었다. 사실 중환자 중에서도 중환자 셔서 어렵게 구한 간병인이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남편이 퇴근하고 나면 아이를 재우고 아빠가 계신 병원으로 달려가 엄마 대신 밤샘 간호를 했다.

병원에서 간병을 요한다는 내용의 진단서를 받아 동사무소에 제출했다. 간병을 인정받아 한시적으로 어린이집을 종일반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내가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사이 아이 아빠가 등원을 시키고 출근을 하고, 내가 하원을 시키던 시절이었다.

형제 없이 외동딸인 처지라 함께 나눌 이 가 남편과 아이 말고는 없었다.


아파트 미고지 분양을 당해 청약통장을 날린 일도 있었다. 법적으로 구제받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너무나 억울해서 어떻게든 청약권을 살려보겠다고 백방으로 날뛰던 때도 있었다. 내 집 하나 마련하겠다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무주택 전세난민으로 산 세월이 너무나 아쉽고 아프고 속이 상했다. 인생에 실패한 것 같고 살아갈 의지도 잃었던 시절이었다.


가장 최근의 일은,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암환자가 된 것일 테다. 유전도 없고 생활습관에 문제도 없었다.

모유수유를 길게 하면 유방암을 예방할 수 있다더니만, 나는 돌 될 때까지 모유수유를 하고 단유 할 때 오케타니 마사지를 받으며 유선에 있는 젖 찌꺼기까지 다 제거했음에도 유방암에 걸려버렸다. 친정아버지 간병과 내 치료 계획과 아이를 챙길 일까지 다 혼자 해내야 했던 그 시절, 딱 1년 전 이맘때 내 곁에는 아이 걱정은 하지 말라며 내 손을 잡아주던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계셨다.


우리 부부의 가장 큰 걱정은 딸아이의 불안과 성장에 있었다. 엄마가 아파서, 아빠가 바빠서, 사는 게 불안해서, 혹여 아이가 불안함 속에 자라게 될까 봐 늘 노심초사했었다. 하지만 우리의 걱정은 기우였다. 주중이면 규칙적인 루틴으로 이루어지는 리듬 생활 속에서 아이는 자기만의 성장 속도에 따라 균형을 잡고 자라고 있었다.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리듬 생활이라는 용어를 쓴다. 간단히 말하자면, 들숨과 날숨의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 영유아기 아이들이 생활의 질서를 형성하고 안정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며 건강한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 리듬 생활이라는 것의 중요함을 이때 깨달았다.

규칙적인 생활, 잘 챙겨 먹는 밥, 숲에서의 발산을 통해 비록 부모의 처한 환경이 벼락같고 벼랑 끝 같았어도 아이는 자신의 세계와 성장 속도를 놓치지 않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암환자가 되고 중증 산정특례를 적용받자 아버지의 간병을 이유로 변경되었던 어린이집 종일반 변경의 명목도 바뀌었다. 주 양육자의 질병.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우리 아이는 거의 가장 일찍 등원해 거의 가장 늦게 하원 하는 아이였다.

수술받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수술 입실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 당연히 수술이 끝나는 시간도 늦어졌다. 내가 마취에서 깨어 회복하는 것을 보고 아이를 하원 하러 가려던 남편의 일정도 덩달아 늦어졌다. 혹여 이런 상황이 될까 봐 가까이 사는 친구에게 미리 하원을 해 아이 아빠가 데리러 갈 때까지 그 집에서 돌봐달라고 부탁도 해놨던 터였다.

“원장 선생님. 수술이 늦어져서요. 하원이 많이 늦어질 것 같아요. ㅇㅇ이 엄마가 제 친구거든요. 그 친구가 대신 하원을 하러 갈 거예요. 오늘은 그렇게 하원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칙상 아이의 등 하원은 어린이집 입소할 때 특정한 특정 가족 외에는 할 수 없다.)

수술방으로 이동하던 중에 전화가 왔다.

아이 불안하게 이리저리 옮기지 말라고.

몇 시가 되건 원에서 안전하게 데리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수술 잘 받으라고.

...

그래서 우리에게 어린이집은, 독박 육아에 독박투 병중인 나에게 있어 어린이집은 참으로 좋은 곳이었다.

40개월. 졸업.

영아 전담 가정형의 한계는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원을 이동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 만 3세가 최대라더니, 정말 졸업을 할 때가 되니 아이가 활동하기에는 턱없이 좁은 곳이 되어버렸다. 사실 생일이 늦으니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되냐고 사정을 해보고 싶었지만, 내가 보기에도 아이에게는 좀 더 넓은 성장 환경을 제공해줘야 한다는 게 보였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지금 발도로프 부모협동조합형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지금도 너무나 좋지만, 우리는 가끔 그 시절을 이야기하곤 한다. 아이원 어린이집 그곳은 정말 너무나 고마운 곳이었다고. 그리고 좋은 어린이집이 더 많이 알려지고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https://brunch.co.kr/@mintc/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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