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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괜찮아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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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Oct 24. 2020

아픈엄마라서 죄인입니다

아기엄마의 투병일기

영유아 검진 서류를 어린이집에 제출해야 했다.
이리저리 어쩌다 보니 독감예방접종 시기와 겹쳐 그 별것 아닌 영유아 검진을 하는데 보름이 넘게 걸려버렸다.
하필 서류 제출 마감일에 걸려서, 오늘은 아침 일찍 어린이집 등원 전에 소아과부터 들렸다.
늘 그렇듯 별것 없을 줄 알았다. 진심으로.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시력검사판에 있는 그림들을 막힘없이 읽어댔던 아이였다.
근데, 오늘은 어째 하나도 읽어내지를 못하는 것 아닌가. 
처음엔 아이가 장난을 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쪽 눈의 시력이 떨어져 있었다. 1년 전에는 1.2였는데 갑자기 0.2 라니. 당연히 소아과에서는 안과 진료를 받으라는 소견을 냈고, 마침 앞에 있는 안과가 문을 열었길래 바로 안과 진료도 받았다. 

그리고는 바로 대학병원 진료를 예약하라는 말을 들어야했다.  

로컬 안과에서는 안된다며, 대학병원에서 조금 더 정밀하게 검사를 하고 시력을 교정해야 한다고.


집 근처에 있는 두 군데의 대학병원에 예약을 걸었다.

아이가 늘 다녀서 차트가 가득 찬 곳은 당장 다음 주에 검사가 가능하고, 안과 잘 보기로 유명한 곳은 한 달 넘게 기다려야 한다. 어느 병원으로 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몰라, 예약된 의사들의 관련 논문들까지 찾아보다 보니 오전 나절이 다 지나가버렸다.
하루 종일 무슨 정신으로 보냈는지.


유방암 환우들이 서울에 있는 명의를 찾아 일단 달리고 보는 것처럼, 내 새끼의 눈이 아프니 나 역시 좋다는 병원부터 어떻게든 예약을 당겨보려고 온갖 잔머리를 굴리게 된다. 정작 내가 암에 걸렸을 때는 가능한 선에서 상황에 맞게 알아서 선택을 했으면서, 역시 자식이 아픈 상황은 다른가보다.



아이에게 눈이 잘 보이지 않았느냐 물으니 그제야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실토를 한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 물으니 그 대답이 가관이다.  
엄마가 걱정할까 봐 그랬다고.

"엄마가 걱정하고 슬퍼할까 봐 그랬어.
그리고 엄마 나 병원 안 급해. 

눈을 가리면 안 보이는데 보여.
나 병원 안 급해. 괜찮아 엄마."

당장 빨리 갈 수 있는 병원과 가장 마음에 드는 병원 사이에서 고민하는 엄마를 한참 보던 아이의 대답이었다. 
불편하지 않다고.
병원은 급하지 않다고.
엄마는 예쁘다고.

...


아빠가 퇴근을 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스프링처럼 현관으로 뛰쳐나간 아이가 방방 뛰며 외친다.
"아빠 빨리 결정해! 나 안경 빨리 결정해!"
아빠 엄마의 타들어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경을 쓸게 될지도 모른다며 한껏 들뜬 이제 곧 만 5세 되는 어린이다. 
분명 좀 전까지는 괜찮다며 엄마를 다독였던 아이 맞나 싶게 아빠를 들들 볶았다.
어서 빨리 어느 병원으로 갈지 결정을 하라고.


이렇게 불타는 금요일이 지나고 있다.

엄마가 아파서, 아픈 엄마 옆에 있느라 눈치만 잔뜩 자란 어린이가 잘 준비를 하는 시간. 
자러 들어가기 전에 엄마에게 와 "엄마, 내 눈이 나빠져서 미안해요..."라며 하지 않아도 될 사과를 하기에, 그저 아이를 꼭 끌어안아줬다. 

혹시라도 아빠 엄마가 못 알아들으면 알아들을 때까지 아프다고 이야기를 해달라고 이야기도 해줬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아플 수도 있는 거라고.
엄마도 어릴 때 눈이 나빠져서 안경 썼었다고.
아픈 건 잘못이 아니라고.
찾아서 잘 치료하면 되는 거라고.
그러니 엄마가 속상할까 봐 참지 말라고.
아이에게 해 준 말들을 듣기는 했는지 알아는 들었는지, 아이는 마냥 꼭 안아주는 엄마 품이 좋은 것 같았다.




나는 아픈 엄마다.
아이 앞에서 아픈 티를 내지 않을 정도로 정신력이 강한 엄마도 못 되는, 그런 엄마다.
그래도, 그럼에도 치료를 잘 받고 이 시기를 잘 견디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항암으로 대머리가 되면 대머리가 된 대로, 항암 부작용으로 밥을 못 먹으면 못 먹는 대로, 좀 부족하더라고 곁에 끼고 있으며 사랑으로 챙기면 될 거라 생각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엄마품이 최고라지만, 그래도 개똥밭이라 아이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나 보다.
아이는 아이답게 자라야 하는데.
최선을 다한다고 발버둥을 쳤는데도, 결국 아이의 가슴속엔 좀 빨리 자란 어린이가 들어앉은 것 같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아플 수도 있고, 눈이 나빠질 수도 있고, 암에 걸릴 수도 있는 건데 말이다.
그럴 수도 있는 건데.
아플 수도 있는 건데.
아픈 엄마라서, 나는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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