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개도 못 끓이던 여자
아이들 장난감 LOL이라면 차라리 나을 것 같다.
오늘 저녁 메뉴는 찜닭이었다.
내일이 마트 정기 휴무일이라, 타이밍 좋게 절단된 닭을 세일가에 들고 왔거든.
이런 날은 기분이 참 좋다. 요즘 기름에 튀기지 않은 맛있는 닭이 먹고 싶었는데 급기야 저렴하게 사 오다니,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언제나처럼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찾아보고 요리를 시작한다.
하지만 찜닭만큼은 자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레시피를 확인하는 용도, 그뿐이다.
잘 손질하고 좀 더 작은 크기로 자른 닭을 잘 달궈진 웍에 참기름을 두르고 익힌다.
며칠 전 한글을 배우던 딸에게 오늘은 진도를 더 나가지 말고 배운 글자를 익히라고 했다가, 글자는 먹는 게 아닌데 어떻게 익히느냐는 말을 들었더랬다. 그러게, 글자는 어떻게 익혀서 먹지? 닭은 이런 걱정 없이 익혀 먹을 수 있어 다행이다 싶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참기름에 달달 볶이며 나온 기름을 거둬내고 준비된 간장 양념물을 붓는다.
특별히 오늘은 유자청도 넣었다.
그 상큼하고 달콤함이 기존의 단짠에 어떤 풍미를 더해줄지 기대가 컸다.
당면은 없지만, 마침 집에 넓적 쌀국수 면이 있기에 그것도 불려 넣고 고기가 더 익기를 기다렸다.
언제나처럼 물 조절에 실패를 했는지라, 물이 졸아들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오늘 저녁의 계획이란 건 사실 이랬다.
찜닭을 완성해놓고, 아이를 후딱 씻기고, 저녁상을 차려 먹고, 치우고, 재우고, 내 일을 마무리하는 것.
시간이 지체되지 않고 바람대로 진행되려면, 최소한 남편이 퇴근해 들어오기 전까지 요리를 마치고 아이를 씻겨야 했다.
하지만 남편이 내 예상보다 일찍 퇴근을 해 왔다.
그래도 괜찮다.
아이가 아빠랑 씻으면 되니까.
먼저 씻고 식사를 하라는 나에게 남편이 말했다.
"내가 보고 있을게. 아이랑 먼저 씻고 밥을 먹자."
뭐, 늘 있는 일이다.
내가 어느 정도 조리를 해 놓고 나면 불 조절 등은 남편이 하고, 나는 아이를 씻기고 먹일 준비를 하곤 한다. 그리고 내가 아이랑 나오면 남편이 씻으러 들어가고, 나는 저녁상만 차리면 된다. 밥을 다 먹으면 아이는 놀고, 남편은 식탁을 박박 닦고 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나는 설거지를 한다. 이게 매일의 일과이고, 우리 부부의 분업 같지 않은 분업이다.
오늘도 음식은 다 해놨으니까, 어느 정도 졸아들면 불만 끄면 됐다.
"음식은 잘 됐어? 불 껐어?"
아이 머리까지 말리고 나오니 집 안에 탄내가 가득했다. 찜닭이 잘 되었는지 묻는 내 질문이 무색하리만큼, 웍은 까맣게 타있었다. 당연히 그나마 살아남은 닭고기엔 탄내가 깊게 베어 들어있었다.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아이랑 씻으러 들어갔다가 나올 동안 남편은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주말이고 밤이고, 하여간 집에 있는 내내 게임만 한다. 아이가 같이 나가서 놀아달라고 해도 아빠는 바쁘다며 게임을 하고, 나 대신 아이의 밥을 챙겨주면서도 게임을 하고, 주말이 피곤해 죽겠다면서도 게임을 한다.
임신 전에는 나도 캔디 크러시에 빠져 밤새도록 게임을 했던 적이 있었던지라 끄고 나오는 게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싶은 순간들이 있다. 그래도 그때마다 적당히 잘 넘어갔던 건, 저러다 어느 순간 게임을 하지 않는 시기가 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을까.
"탄내가 나잖아!"
급하게 부엌으로 달려가는 내 뒤를 따라 남편이 그제야 부엌으로 들어왔다.
냄비는 새까맣게 타 있었다.
'ㅁㄴㅇㄹㄴㅇㄹㅎㅍ뢰바ㅓ무파ㅡㅜㅊㅌ;ㅣ마Jflwkrhjgbvnk.,msmc'l;wJezbcxvNBfgszxjdhtfgqwvfdv!!!!'
단전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오는 짜증이 목구멍까지 치받았다.
애 앞에서 부부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는데, 남편이 타버린 음식들 상태를 보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불을 끄라고 말을 해줬어야지."
심호흡 크게 한 번 하고 대답했다.
"항상 내가 아이랑 씻으러 들어가면 자기가 음식을 봤잖아. 음식 보고 있겠다고 했잖아?"
삼 초 후, 그가 말을 이었다.
"이건 못 먹겠지? 냄비는 버려야겠다."
이 초 후, 내가 말을 이었다.
"그게 얼마짜린데 버려. 불려서 내가 내일 닦을 거야."
그랬다. 이게 어떤 웍인데.
엄청나게 비싼 그런 냄비는 아니어도, 결혼 준비하면서 내가 백화점에서 하나하나 골라가며 사 모은 것이었다.
생전 처음 내 살림이 생긴다며, 이렇게 예쁜 냄비에 예쁜 음식 만들어 먹겠다고 희망에 젖어 행복해했던 그런 냄비였다. 근데 그걸 태워먹고선, 탔으니까 버리자고?
목소리 톤이 높아지면 바로 싸움이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던 중이었다.
남편이 물었다.
"저녁은 뭐먹어?"
그때 아이가 방에서 뛰어나왔다.
"엄마, 죄송해요. 제가 로션은 안 바르고 그냥 내복을 바로 입어버렸어요."
저녁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남편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겨울이라 로션을 꼭 발라줘야 한다는 게 이유였지만, 사실은 그 순간 남편이 꼴도 보기 싫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뭐든지 다 내 손이 닿아야만 하는 저 부녀에게 화가 났다.
아이는 계란 프라이면 된다고 했다.
영양 가득한 찜닭이 있었는데 계란 프라이에 밑반찬에 밥이라니.
남편은 어제 끓여놓은 게살 수프를 먹겠다고 했다.
일단 계란 프라이를 해서 아이 밥상을 차려주고 소파에 널브러져 버렸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냥 멍하니 앉아있다가, 마침 울리던 카톡방에 대나무숲을 해버렸다.
"찜닭을 했는데... 내가 00이 씻기는 사이에 남편이 LOL 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다 태워먹은 거 있지. 아.. 돌아버리기 직전이야. 혼수로 해온 웍인데. 탄 거 걍 버리라는데 진짜 한대 칠 뻔."
남자들은 어째 나이가 들어도 중학생이냐는 지인의 대답에 기분이 조금 풀렸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웍은 콜라 사다 부어놓고 내일 살살 끓여가며 닦아야지.
핸드폰 게임하느라 음식이 타는 줄도 몰랐다니.
마흔 넘은 아저씨가.
그 집중력을 칭찬해야 하는 건지, 니 나이가 몇 개냐며 등짝 스매싱을 해야 하는 건지.
문득, 오늘 낮에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다.
며칠 전, 내 일과 관련해 남편이 이리저리 피드백을 주는 것들을 듣다가, 나는 아직도 교복 입은 고등학생인 것 같은데 이런 복잡한 것들을 생각하고 처리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괴리감이라 해야 할까. 순간 그런 감정이 들었더라는 내 말에 친구가 이런 말을 해줬다.
"우리 나이가 그렇다잖아. 머릿속은 아직 10대 청소년인데 몸은 중년을 목전에 둔 아줌마 아저씨라고."
그래, 당신이나 나나 애 어른이지.
'으이그 화상. 내 언제고 시어머니 만나면 이 일 꼭 이를 거다.'라고 생각하며, "게살스프 끓여놨어 챙겨 먹어."라고 말을 건넸다.
그는 알았다고 대답을 할 뿐, 계속 까맣게 탄 냄비만 쳐다봤다.
콜라 사다 밤새 불리고 내일 닦을 거라는 내 말은 귓바퀴를 타고 넘어가 버렸는지, 그는 베이킹소다를 잔뜩 부어가며 계속 냄비를 끓이고 긁어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저 남자는 냄비를 긁었다.
그리고 결국 다 닦아 냈다.
아이를 재우고 거실로 나와 이 글을 쓰는 새벽, 게살 수프 냄비는 그대로 있고 솥에 남겨놓은 밥도 그대로다.
냄비 닦느라 고생했다는 내 립 서비스에도 남편은 고개만 끄덕이고는 등돌린채 잠을 청했다.
기분 좋게 준비한 저녁 식사가 어색한 침묵과 짜증의 시작이 되어버렸다.
이러다 또 허허실실 웃으며 실없는 농담이나 주고받는 시간이 돌아오겠지만, 까맣게 타버렸던 웍을 보면 한동안 생각이 날듯 하다.
남편이 핸드폰 게임을 하느라 냄비 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자기가 냄비를 태워 먹고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고.
똑같이 내가 게임하느라 애도 못챙기고 음식도 다 태워먹었으면 큰소리 내며 난리를 했을 거면서.
어쩌면 나중에 나중에 내가 죽어서 화장을 하면 사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아, 이게 사는건가.
시어머니 만나면 컴플레인 넣어야지.
어머니의 마흔살 넘은 큰아들이 핸드폰 게임하느라 냄비 타는 것도 몰랐다고.
...
나, 생각보다 뒤끝이 긴 여자다.
이게 다 LOL 때문이다.
상지 : 商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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