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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Jan 28. 2021

아프니까 청춘인가.

탑골가요

간! 다! 와다다다다!



97년도에 내가 몇 살이었더라.

밤마다 라디오를 들으며 교환일기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별밤을 들었던 것 같다.

벅이 부른 맨발의 청춘은, 그 깊은 밤 라디오에서 자주 나왔던 노래였다.

찾아보니 이 곡이 97년도 인기가요 1위 곡이었다.

맨발의 청춘.

믿을 거라곤 오직 배짱뿐이라지만, 젖 먹던 힘까지 다 해 달릴 테니 내가 사랑하는 너는 나를 믿고 따라오라는 혈기왕성한 20대 남자의 노래였다.

역시나, 이게 무슨 뜻인지도 잘 몰랐던 그 시절의 나는 이 노래를 즐겨들었다. 아마 분명 그 시절 라디오를 듣다가 녹음 버튼을 눌렀던 테이프 안에 이 노래도 있을 것이다. 앞이나 뒤가 광고로 끊겨있겠지.



시아버지가 돌아가실 것을 모두가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던 즈음이었다.

혹여 내가 상속에 관여할까 싶었는지 남편이 고민을 털어놨다. 그때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은, 우린 아직 젊어서 맨주먹으로라도 버틸 수 있다지만 어머니는 그게 힘드실 테니 어머니 사실 궁리부터 해드리는 게 우선일 것 같다는 것이었다. 30대 초반의 우리는 비록 갓난아이를 키워야 한다 해도 아직 딛고 일어날 날이 많고 젊음이라는 깡이 있으니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88만 원 세대의 깡이었다.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라는 이해찬 1세대라지만, 사실 우리도 선배들만큼이나 빡세게 공부했고 일했다. 격동의 시기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우리가 얻은 건 88만 원 세대라는 꼬리표, 고학력 저임금 비정규직 사회라는 선물이었다. 그래도 우리에겐 희망이라는 게 있었다. 자리를 잡을 때까지 고시원에 살며 취업을 준비해도 가끔은 친구와 신사동 가로수실에서 일본 가정식을 브런치로 즐길 여유가 있었고, 그래도 취업에 성공하면 조금 더 나은 주거지로 옮겨갈 가능성이 열렸으니까.

김난도 교수가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사람들의 뭇매를 맞았다. 청춘이란 아프고 흔들리는 것이라 했다던가. 원래 청춘은 좌충우돌의 시기이다. 그 시기 치열하게 아프고 실패도 해봐야 철이 들고 인생을 알게 되어 사람다운 중년 이후의 삶을 살게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떠올랐다.

구의역에서 한 비정규직 청년이 스크린도어 수리를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사건이 있다. 그날 그 청년의 가방 속에는 아직 뜯지 못한 컵라면이 들어있었다던가. 그 즈음 자칭 자취하는 흙수저 대학생들이 먹고사는 이야기가 화제였다. 쌀값을 아끼기 위해 쌀을 볶아 물에 넣고 끓여 마시고, 돼지비계만 싼값에 사다 고기처럼 구워 먹고 국에 넣어 먹는다고 했던가. '요즘 것들은 배가 불러서 고생도 모르고 편한 길만 가려고 해서 문제'라던 부모님께, 그 요즘 것들의 많은 수가 저렇게 버틴다는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요즘 것들은 편한 길만 가려 한다고.

그 요즘 것들은 실패할 권리가 없다.

이렇다 할 빽도 없고 비전도 없다면 머리라도 좋거나 재주라도 좋아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부모의 뒷배를 따라갈 방법이 없어서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계급이 나뉜다. 가진 자원이라고는 사람뿐인 나라여서 요즘 것들은 유치원 다닐 나이 때부터 경쟁을 시작한다. 드라마 <미생>에서 고졸에 계약직인 장그래를 두고 낙하산이라 비난하던 이가 한 대사가 있다.

"우리 엄마가 나 학원 보내고 과외 붙이느라 쓴 돈이 얼만데! ... 나도 좀 놀걸. 중고딩 내내 12시간 내 자본적이 없다고."




내가 실패를 하고 주저앉으면 누군가가 바로 치고 올라오는 세상을 산다.

내가 20대 청춘이었을 땐, 헐값에 청년의 재능과 에너지를 사용하며 재능기부라 치켜세워줬고, 그 또한 하나의 스펙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많은 청년들이 재능기부로 자신의 젊음을 갈아 넣었다. 구의역 김군의 세대는 안타깝게도 더 열악한 것 같다. 청년 창업이나 스타트업 같은 기회를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기업에서 제공해 주고 예산 지원도 많이 해주는 것 같으나, 사실 이건 경제적 여건이 그렇게라도 취업과 경제력 재생산의 물꼬를 터 줘야 만 하는 상황이기에 그렇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니, 맨발로 달리는 청춘이어도 젖 먹던 힘까지 다 해 한 번뿐인 인생 잘 살아내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낭만은, 안타깝게도 이 세대에게는 사치일 것 같다.

우리가 결혼하던 즈음 3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유행이었다.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를 포기해 삼포세대라던가. 8년이 지났다. 이제는 N포세대 라고한다. 연애 결혼 출산에 집과 경력을 포기하는데, 여기에 자꾸 뭘 더 포기하는 게 늘어나서 N포인가보다.


집.

올해 들어 서울 안에 내 집을 마련하는 20-40대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 K자 양극화 국면에서 누군가는 상승곡선을 타고 자산을 불려 내 집을 마련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주변은 다들 무섭게 치솟는 부동산과, 주변의 자산증식 속도를 보며 느끼던 상대적 박탈감 끝에 영끌을 한 경우들이었다.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부동산 값을, 혹여 이게 버블이라 하더라도 버티다 보면 더 오를 집값으로 갚을 날이 올 거라는 희망 말이다.

단 한 번 삐끗하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칼날 위를 오늘도 우리는 걷는다.

그 칼날 위를 2030의 우리는 맨발로 걷는다.

자산 계획이 자칫 어긋나면 빚더미에 빠져 삶을 포기해야 하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암에라도 걸리면 돌아갈 일자리가 없거나 불안해진다. 내가 넘어져 멈춰있는 사이, 동기들은 집을 사고 아이를 낳고 공부를 더 하고 자산을 불리며 열차의 머리칸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말이다. 그걸 보고 있는 내가 멈춰있는 곳이 꼬리 칸으로 움직이는 무빙워크라는 사실이 소름 끼치도록 무섭다.



작은 시민단체에서 일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정말 돋보이던 임원 부부가 계셨는데,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을 하셨던 이른바 386세대였다. 부인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생활운동을 지속했고, 시국사건으로 투옥하고 대학에서 제적되었던 남편은 대기업에 근무 중이라고 했다. 집에 깔려있는 부채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시세로 20억에 육박하는 아파트를 자가 소유한 가정이었다. 아이들을 유학 보내고 두 내외만 남자, 살던 집을 세를 놓고 서울 어느 호젓한 동네로 이사를 가셨다던가. 모두가 그 부부를 부러워했다.

인생의 사다리가 끊기지 않은 세대라는 사실이 나는 가장 부러웠다.

공교롭게도 저 부부가 한참 자리를 잡기 위해 맨발로 달리던 20-30대 시절에 공전의 히트를 쳤던 노래가 바로 <맨발의 청춘>이었다.

인생은 한 판의 멋진 도박.


그 시절 우리는 선배 세대를 꼰대라 불렀다.

그 꼰대들은 지역의 사회문제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은 채 현실을 영위만 하는 우리 세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내 대답은, 우린 언제 이 도시에서 밀려날지 모르는 사람들이라 그렇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꾸준히 모으면 예적금만으로도 집을 사던 시절을 살았던 분들은 도저히 이해 못 할 말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부동산 자산가를 탄압하는 거라며 집 가진 자들이 광화문에 모인 일이 있었다. 그때 일각에서는 왜 무자본가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느냐는 말을 내뱉었다.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일까 의문이 들었다.

무자본인 사람들은, 당장 오늘 먹을 쌀이 없어서 라면을 네 조각으로 나눠가며 먹어야 하는 청춘에게는 거리에 나가 목청 높일 시간이 없다. 그 시간에 뭐라도 더 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그 시간에 뭐라도 더 해서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야만 하니까.



1997년 벅이 부른 맨발의 청춘이 다시 인기이다.

일생의 쓴맛 단맛 볼 만큼 본 탑골 아줌마가 들어도 여전히 둠칫둠칫 신이 난다.

하지만 마음 한 켠 남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다.

97년 12월 IMF가 오기 전, 백화점에서 초콜릿 하나만 사도 세상 아름답게 포장을 해주던 버블의 시절.

적어도 그 시절엔 사다리가 남아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 노래에 어깨가 들썩이는 건 마찬가지다.




상지 : 商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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