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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코끼리 May 12. 2018

알로하

낮잠과 동물원

 큰 맘먹고 긴 휴가를 갖기로 했다. 발리 한 달 살기가 나의 버킷리스트였으나, 한 달의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고, 여행 계획을 하던 그 당시에, 하필 발리 화산에 대한 기사를 접했던 터라 다음 기회를 기약하였다. 그래서 나는 치앙마이도 눈을 돌렸다. 열흘의 치앙마이에서 유유자적 한 생활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치앙마이가 3월에 화전으로 인해 공기가 안 좋다는 글을 우연히 접했다. 천식약을 복용하고 있는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가기에는 마음이 불편했다. 지긋지긋한 미세먼지를 겪고 있으니 휴가만큼은 공기 좋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결국 선택한 곳은 하와이였다. 주변에서 모두들 하와이를 찬양했지만 나는 웬일인지 그곳이 끌리지 않았다. 여행비가 발리나 치앙마이 보다 훨씬 많이 들 일도 부담이었다. 그래서 하와이로 결정되자마자 내가 한 일은 초반 4박을 민박집으로 예약하는 일이었다.


 장거리 비행은 처음 겪는 예민한 아들내미가 걱정되었으나 막상 비행기를 타니 아이는 열심히 만화를 보고, 열심히 기내식을 먹고 푹 밤잠이 들었다. 운이 좋게 우리 옆에 빈자리가 있어, 아이를 옆으로 눕힐 수 있었다. 문제는 나다. 계속 부정적인 생각이 뭉실뭉실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워낙 비행기에서 잠을 못 자는 나이지만, 어떤 자세도 불편하고, 목이 뻣뻣해오고 속이 불편했다. 비행기를 타기 전, 손주를 보러 인천공항으로 배웅 와준 친정엄마가 한 한마디가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요즘 나 같은 엄마들은 다들 우울해. 다 키워 놓고 나니 어린 시절 엄만 왜 그랬냐는 원망이나 들으니까 말이야."

 

 공항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엄마가 사위에게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한 말이다. 웃어넘겼지만, 몇 시간 내내 찜찜한 기분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감정 표현을 잘 안 하면서 자라다가, 육아를 하며 느끼는 다양한 감정 그리고 내 안에 있던 서운함과 상처들을 이야기하고 싶어 져 가끔 툭툭 뱉고 있는데 엄마에게는 너무 깊은 상처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면 조금 내 마음이 위안을 얻지 않을까 싶었지만 오히려 무거운 짐을 마음 한켠에 실는다.


 8시간이 넘는 밤 비행 동안 나는 30분도 채 자지 못하고 엉망인 컨디션으로 오아후에 도착했다. 민박집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낮잠이었다.  붕붕 거리는 낡아 빠진 에어컨을 튼 채 남편과 나와 아들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잠을 자다가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늦은 오후였다. 지독하게 시차 적응을 못했던 나는 억지로 일어나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우린 지금  뭐라도 먹으러 나가야 한다고. 렌터카로 거리를 헤매다가 우연히 내가 블로그에서 봤던 <시그니쳐 프라임 스테이크 앤 시푸드> 레스토랑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다. 알라모아나 호텔 36층, 해피아워에 가면 꽤 낮은 가격에 질 좋은 스테이크를 만날 수 있다.  



 다음 날 아침, 하와이 출신 오바마가 언급해서 유명해진 <레인보우 드라이브 인>에서 로코모코를 먹었다. 조금 퉁명스러운 직원들의 태도와 나에게는 그저 그랬던 음식 맛 그리고 아이의 짜증이 합쳐져 내 기분은 바닥을 향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근처 호놀룰루 동물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 것이 싸고 좋다는 민박집 사장님 조언대로 그곳에 주차를 하려는데, 몇 바퀴를 돌아도 자리가 나지 않았다. 아들은 빨리 동물원에 들어가고 싶다고 아우성이었고, 주차를 기다리는 우리 부부도 슬슬 짜증이 차오르고 있었다. 급기야 남편은 그냥 둘이 내려서 동물원 구경을 하라며 본인은 민박집 가있겠다는데 내 심정은  사면초가가 되었다. 혼자만 맘 편히 쉬겠다는 작정인 남편이 얄미웠고, 운전을 못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나의 분노를 담아 차 문을 쾅 닫고 아들과 동물원에 입장했다.  


 그러나 동물원에 입장하자마자 맑은 하늘, 만발한 꽃들에 짜증과 분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와......."

 우리는 삼각대를 세워 수많은 사진들을 찍었고, 잔디밭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내가 생각하던 동물원보다 펜스들이 아주 낮은 것이 신기했고, 전혀 다른 동물들이 한 우리에 섞여 있는 것이 신선했다. 작아서 기대를 안 했던 동물원이었는데, 되돌아보니 나는 이 곳에서 하와이 여행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의 짜증으로 찜찜하게 민박집에 도착했던 남편은 모자의 행복한 표정이 담긴 셀카사진을 전송받고 마음 편히 낮잠에 푹 빠졌다는 후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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