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였다. 2015년 10월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반올림이 농성을 시작한 날이. 그리고 1000일 넘게 그 농성은 계속되었다. 10월 11일이 결혼 기념날이니, 결혼식을 3일 앞둔 날에 농성을 시작한 거였고, 결혼 전날까지 농성장에 있던 나나, 농성장에서 밤잠을 설치고 결혼식에 참석한 동료들이나 어설픈 상황이었다.
캠핑은 안 하리라 마음먹었다. 낭만은 무슨. 사계절을 고스란히 느끼고, 추위와 더위 모기와 소음을( 캠핑이라면 자연의 소리겠지만) 낭만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캠핑과 다름없는 거리 생활이 힘겨웠다. 오늘에도 농성을 하는 투쟁의 현장들은 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가 있어서이지 거리가 결코 좋아서가 아니다.
농성장을 지낸 직업병 피해자 가족이 이 노래 가사에 마음 시렸다고 했다
내가 왜? 정윤경 작사/작곡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 땐 너무 춥더라 인생도 시리고
도와주는 사람 함께하는 사람은 있지만 정말 추운 건 어쩔 수 없더라
내가 왜 세상에 농락당한 채 쌩쌩 달리는 차 소릴 들으며 잠을 자는지
내가 왜 세상에 버림받은 채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됐는지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 땐 너무 춥더라 인생도 춥더라
제한적으로 아껴 틀어야 하는 발전기, 고가이기에 관리를 해야 하고, 살림살이는 갈수록 늘어도 불편하고, 가스와 물 석유는 떨어지지 않게 준비하고, 버너를 틀 때는 가스 냄새를 조심히 해야 하며, 충전한 랜턴으로 어두운 내부를 밝힌다 해도 추위에는 빠르게 배터리가 닳아 금방 꺼지고, 가스난로로 온기를 만들어도 가스 중독에 늘 염려이고, 히말라야에서도 거뜬하다는 침낭도 여럿 쓰다 보면 위생도 걱정이지만 아침마다 작은 가방에 밀어 넣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고, 연대하러 온 사람들이 고마워도 매번 늘 다른 이들을 만나야 하는 것이 요즘 말하는 I 성향의 활동가에게는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맥주라도 한 캔 들이키는 건 신문에 날 일(실제 '농성장 술판'이라는 가짜 뉴스가 뜨기도 했었다) 농성장을 감시하는 CCTV로 농성장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마냥 즐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밤마다 벽돌과 비닐로 문단속하는 건 할 때마다 귀찮은 일, 농성 100일 된 날 '농성장 사용 설명서'라며 유튜브를 신나게 찍던 나는 1000일의 농성장 지킴이의 고단함을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그뿐인가... (이만 줄인다)
그런 내가 캠핑을 하겠다고 지인에게 받아둔 텐트를 햇빛에 말리고, 용품들을 정비하다니! 격세지감이다.세월이 흐르기도 했고, 아이 친구 부모님과 어울리다 보니 캠핑이 꽤 낭만적이었다 무거운 짐을 날라고 즐겁고, 전기는 무제한에 걱정 없고, 손님 초대하여 먹는 재미 쏠쏠하고, 화롯불을 쬐도 서럽기보다 따스하고 이젠 오로라 불빛에 마시멜로를 구워 먹는 재미까지 있더라. 캠핑장에 자장 라면만 먹어도 맛있고, 음악도 재즈나 캠핑음악 틀어놓으면 분위기가 참 좋다. 아이들은 텐트 안에서 넷플릭스로 만화들을 자유롭게 보며 즐거워하고, 쾌적한 화장실과 안전한 놀이터를 제 맘대로 오가며 자연을 즐긴다.
애초 캠핑과 농성의 같은 점은 집을 떠났다는 것밖에 없었는지 모르겠다. 장소도, 사람도, 용품의 수준 모두 다를 텐데, 오히려 비슷하고 싶었던 건 아닐지. 농성할 땐 짜장면, 설렁탕 이런 것보다 피자, 샌드위치, 마카롱을 선호하며 애처로움을 상쇄하려 애썼었다. 농성장 지킴이들과 농담도 하고 여행 이야기며 취미 이야기도 하며 긴장감을 낮추었다. 농성장 물품은 최대한 깔끔하려 애썼고, 그때 장만한 이케아 장은 오래도 썼다. 어쩔 수 없어 나온 거리생활이지만 시민을 만나 사안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시민과 함께하는 여러 방법을 고민했다. 영화도 틀었고, 음악도 영화 음악으로 잔잔한 것으로 선택했고 문화 공연도 배치했다. 여러 사람들을 초대하여 자엽스럽게 대화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봤다. 구호를 외치는 집회 사회는 여전히 어색하다.
벌써 5년 전이다. 여전히 지금도 거리에 나온 절박한 투쟁 현장들이 많다. 투쟁하는 이들이 너무 소진되지 않기를. 세상도 그들을 외면 말기를. 연대의 손길을 나부터 내미는 이가 되고자 한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농성장보다 캠핑장을 더 가까이하게 된 내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