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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은 Feb 16. 2024

여성 해방의 날은 오려나.

끝나지 않는 노동의 끝

*기획노동 : 어린이 스케줄 일정 변경, 학원 알아보기, 방과 후 일정 등록,  등등 (일상 가사노동에 포함되지 않은 영역)을 주제로 이야기를 곧 하기로 했다.


아이를 재우려 침대에 같이 누웠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가 아니라 무슨 얘길 골라야 하나 싶어서. 침대 밑에는 철이 지났거나 미리 얻어둔 옷들이 그득하다. 사이즈별, 계절별로 한 번씩 꺼내 정리해 두었다. 먼지 풀풀 풍기며, 아이 놀잇감 사이 자리 잡고 큰 마음먹고 계절별로 기획노동을 해 둔 거다. 남편은 절대 하지 않을 일.


침대 옆 옷장엔 옷들이 참 많다. 우리 부부는 평등 선언문을 낭독하고 결혼했고, 빨래는 내 몫으로 해뒀다. 켜켜이 접어둔 옷이 많기도 많다. 옷들 대부분은 물려받은 옷들이다. 참 고맙다. 계절별로 옷을 사러 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니. 돈보다 시간을 아낀 게 너무 감사하다. 그 마음 알고 옷을 챙겨준 이는 남편의  직장동료다. 물론 여성이며, 사이즈는 내가 알려줬다. 옷을 받아온 수고도 기획노동으로 쳐주겠다만, 매번 그는 물어왔다. "이건 누가 준거지? 이건 언제 받은 거지?"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관심은 거두어주기 바란다. 내가 기억하고 챙겨야 할 것은 너무나 많으니.


얼마 전부터 아이가 자꾸 팬티가 자꾸 낀다고 불편해했다. 신발, 양말, 삔, 가방, 옷, 책, 문구... 살아가며 입고 먹고 자고 놀고 공부하는 모든 것을 챙기다 속옷을 놓쳤나 보다. 넉넉히 10개를 사 왔더니, 편하다고 당장 입어보고 좋아라 한다. 내가 참 미안하다. 기획노동은 해도 해도 모자라는구나.


초등학교 입학이 얼마 안 남았다. 아이에게 책상과 의자를 마련해줘야 할 것 같다. 아하. 그러자니 서재를 다시 재배치, 재구성해야 한다. 유아기 때 쓰던 책상을 버리긴 아까운데, 우리 책상과 어찌 배치해야 할지, "오늘의 집"에 나온 간단 버전의 캐드까지 이용해 이리저리 배치하고 보면, 남편이 한 마디 한다. "대단한데! 역시!" 나도 칭찬하고 감탄하는 존재이고 싶다. 아직 책 하나 옮기지 않았으므로 이 기획노동은 아직 했다 하기 힘들다.


진짜 고민은 아직 남았다. 초등학교 돌봄 교실에 떨어졌다. 3월부터 아이가 오전이면 수업이 끝나고 돌봄 공백이 예상됐다. 1월부터 한 달 넘게 집중한 기획노동은 돌봄 대책  마련이었다. 어떻게 해? 라며 남편은 걱정을 물어왔지만, 자신의 고민은 안 되었다. 여전히 돌봄을 여성의 몫으로 보는 사회적 관습과 선언으로 구현하지 못한 평등한 가사, 육아 분담! 돌봄 대책 마련은 내 몫이다. 기자회견, 인터뷰, 기고, 토론회, 유튜브 등 참으로 적극적으로 초등 돌봄 문제를 알렸고, 늘봄학교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아이 하나 키우기 참으로  힘들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전만 해도 참.. 정신이 없었다. 매일처럼의 일이지만, 등원을 위해 아이를 깨우고, 도시락통 물통 간식통(꼭 유치원에서 준 초록 가방에 넣어줘야 한다. 스마일 포크도), 아이가 좋아하는 텀블러를 가방 한가득 챙겨 유치원에 보냈다. 집에서 20분 차로 떨어진 유치원으로 가는 길, "초등학교 1학년 예비 학부모 수업"을 들었다. 학부모만 들어야 하지만, 아이도 함께 들으며 한글을 읽는 연습을 앞으로 해야 하는구나. 자기 짐은 스스로 챙기는 연습을 해야 하는구나. 같이 들었다. 알아서 잘 해주길. 아님 내 앞에 또 떨어지는 기획노동이란다. 아이를 유치원에 내려놓고 돌아오는 길, 아니 출근길 나는 귀로는 학부모 될 준비를  계속 했다.    


나만 이런 게 아니다. 요즘 한창 초등학교 1학년 예비 학부모의 관심인 돌봄, 늘봄학교를 두고 아이 친구 엄마와 정보를 공유했다. 그쪽도 일하면서 부지런히 카톡을 확인한다. 답이 늦더라도 서로 안다. 짬을 내 아이를 챙기고 있음을. 내일 예비 학부모 수업 2에는 이어폰을 끼고 듣겠단다. 이번엔 아이 친구 아빠다. 내가 다 반갑다.


우리 아이의 아빠는? 밤12시 가까이나 돼서 맥주 사들고 귀가했다. 본인이 맡은 설거지가 지금 한가득이다. 부엌 담당이지만 냉장고 정리, 재고파악은 안 하니, 많이 사진 마라 했다. 식사 담당자는 보통은 화, 목에 보통 일찍 오는데, 오늘은 일이 많다고(진짜일까) 그마저 안 했다. 아이랑 나는 누룽지 끓여 명절에 얻어온 반찬 3종 세트랑 맛있게 먹었다. 냄비 싹 비워준 아이에게 고맙다. 반찬이 떨어져 간다. 곁들인 맥주가 참 맛있다.


아이를 재우고 나온 밤 12시, 나도 살짝 잠들뻔하다 겨우 나왔다.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니. 이 글까지 쓰고 나면 머리가 좀 비려나. 이제 나도 쉰다. 오늘의 노동, 이제 끝이다. 여성해방의 날은 오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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