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를 부르는 침묵의 시간

시간 속에서, 오롯이 나를 마주하는 법

by 민토


​어느덧 마흔이라는 숫자가 내 이름 앞에 붙었다. 공자(孔子)는 이 나이를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이라 칭했으나,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40대에게 이 단어는 사치스럽거나 혹은 너무도 비현실적인 옛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흔들리지 않기는커녕,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밀려오는 중압감에 비틀거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20대와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꿈’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거창한 명사일 때도 있었고, 가슴 뛰는 동사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마흔 줄에 들어선 지금, 나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누군가 지금 당신의 꿈이 무엇이냐 묻다면,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이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견뎌내는 것.”


​언제부터였을까. 나의 목표는 성취가 아닌 생존이 되었다. 직장에서의 압박은 이겨내고 자리를 보전해야 하고, 집에서는 든든한 가장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오늘 내가 땀 흘려 일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부족함 없이 행복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나의 아이들이 부모의 능력이 부족해 자신의 꿈을 접는 일이 없도록 기회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 것. 그것이 지금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명분이자 동력이다. 나는 나의 꿈을 지우고, 그 자리에 아이들의 꿈을 심었다. 내가 거름이 되어 아이들이라는 꽃을 피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러나 그렇게 타인을 위한 삶을 살다 보니, 정작 ‘나’라는 존재는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듯한 공허함을 지울 수 없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소파에 기대어 무심코 텔레비전을 켠다. 화면 속 세상은 화려하다. 유명 연예인들이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고, 최고급 외제차를 타고 질주하며, 이름 모를 휴양지에서 호화로운 만찬을 즐긴다. 예전 같으면 그들의 삶을 보며 부러움에 한숨을 쉬거나, 나도 언젠가는 저런 성공을 거두리라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의 나는 그 화려한 물질의 향연 앞에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가진 명품도, 그들이 타는 슈퍼카도 내 눈에는 그저 또 다른 ‘관리의 대상’이나 ‘소비의 피로’로 보일 뿐이다. 저것을 갖기 위해 감당해야 했을 치열함이나, 저것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야 할 에너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피로감이 몰려온다. 물질적 풍요가 주는 찰나의 기쁨이 지금 내 가슴속 깊이 뚫려버린 구멍을 메워줄 수 없음을, 마흔의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마주친 어떤 장면에서, 나는 리모컨을 쥔 손을 멈추고 만다. 그것은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장면일 수도 있고, 다큐멘터리의 한 대목일 수도 있다. 화면 속 인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인적 드문 숲속에 캠핑 의자를 펴고 앉아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불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향해 시선을 던진 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다.


​화려한 배경음악도,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도 없다. 오직 바람 소리, 물소리, 장작 타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운다. 그 순간, 나는 벼락을 맞은 듯한 강렬한 질투와 사무치는 부러움을 느낀다. 저 사람은 지금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있구나. 누군가의 호출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처리해야 할 업무의 마감 시한에 쫓기지도 않으며, 가장으로서의 의무감조차 잠시 내려놓은 채 오롯이 ‘자신’으로만 존재하고 있구나.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명품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 아니라, 시계를 풀어놓고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릴 수 있는 자유였다. 명품 가방에 담을 물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이라는 짐을 잠시 내려놓을 빈 공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40대에게 ‘멍 때리기’란 단순한 뇌의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절규에 가깝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쫓기듯 살아간다. 아침 알람 소리에 쫓겨 일어나고, 출근길 인파에 떠밀려 회사에 도착하고,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 퇴근 후에는 집안일과 육아라는 또 다른 과업을 마주한다. 잠자리에 드는 순간조차 내일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머릿속을 맴돈다. 단 10분이라도 온전히 나에게 집중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나의 기분, 나의 상태, 나의 호흡을 느껴본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화면 속, 자연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은 평온하다. 그 평온함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멈춤’에서 오는 선물이다. 아무런 목적 없이, 생산적인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 나는 그 절대적인 고독과 정적이 미치도록 부럽다.


​어쩌면 지금 우리 40대에게 필요한 ‘꿈’은 거창한 성취나 노후 대박이 아닐지도 모른다. 잠시 세상의 스위치를 끄고,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의 끈을 느슨하게 푼 채, 자연 속에 나를 방목할 수 있는 하루. 그 짧은 ‘여백’을 갖는 것이야말로 이 치열하고 가혹한 시대를 건너가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꿈이 아닐까.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일에 대한 열정이 식어서도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랫동안 나를 잊고 살았기에, 내 영혼이 숨 쉴 구멍이 필요할 뿐이다. 쫓기는 짐승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안의 어린아이를 다독여줄 시간, 타인의 욕망이 아닌 나의 침묵에 귀 기울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텔레비전 속, 모닥불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언젠가 나도, 저들처럼 아무런 목적도 없이 훌쩍 떠나보리라.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그저 흐르는 물을 보고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내가 살아있음을, 내가 ‘누구의 무엇’이 아닌 그냥 ‘나’임을 느껴보리라.


​오늘도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나간다. 가족의 웃음과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하지만 가슴 한편에는 작고 소중한 꿈 하나를 몰래 품어본다. 언젠가 찾아올,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숲속에서의 완벽한 고립. 오직 나 자신과 대면하는 그 고요한 사치의 순간을 꿈꾸며, 나는 오늘이라는 또 다른 전쟁터를 견뎌낸다. 이것은 도피가 아니다. 다시 살아가기 위한,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기 위한 40대의 간절하고도 슬픈, 그러나 아름다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