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토리 Feb 23. 2020

영국에서 제 밥그릇 챙기기

10. 겸손함은 미덕이 아니다 

내 이력서에는 정확히 2년의 공백기간이 있다. 마치 무슨 요정에게 홀려 다른 세계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시간이 엄청 흘렀더라, 하는 동화책 이야기 마냥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아무리 봐도 이력서에 적을만한 아무런 경제적 활동 없이 2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거다… 그리고 그 2년은 둘째가 태어난 후 두 돌을 맞을 때까지의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영국에서 만난 이방인이다. 둘 다 가족들 사이에서 까만 양 (Black sheep) 같은 존재라서 가족들 도움 없이 장기간의 유학/직장 생활을 하며 살아남은 케이스였고, 그래서 당연하게도 임신과 출산 때도 누구 하나 와서 도와준 적이 없다. 그리고 첫째를 임신하고 7개월째 이사를 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그렇게 우리는 우리만의 가족을 만들었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는 출산 예정일 1주일 전까지 일을 했고, 첫째가 태어난 후 5개월 되었을 때 파트타임으로나마 복직을 했다. 그렇게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할 때까지 남편과 둘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가 둘째 출산 전 마무리 지은 프로젝트가 내 2년 공백기의 첫 시작이 되어버린 거다. 


첫째 때는 그래도 남편이 아이를 봐주면 숨 돌릴 틈이라도 있었는데.. 둘째가 태어나고 나니 숨 돌릴 틈도 없고, 해외생활 몇 년 만에 다시 경제력이 없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어서 돈을 벌지 않는 대신 가능한 남편 돈(!)은 쓰지 말자 뭐 그런 생각에 유학생활 초기 때처럼 재정상태에 가장 민감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걸 가지고 남편이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나 혼자 자격지심이 들어 아이들을 Nursery (어린이집) 같은 곳에 잠시라도 보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혼자 아이들과 지내며 버텼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이들의 성장과는 별개로 내 인생에는 일시정지 버튼이 눌러져 있던 순간이었다. 나는 늘 피곤했고 바빴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적었고, 실제 사람과 하는 대화보다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더 많았다. 머릿속에는 아주 거대한 블랙홀이 하나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는데, 갈 곳 없는 생각들이 늘 머리를 가득 채우다가 어느 순간에는 블랙홀로 다 빨려 들어간 듯 텅 빈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때 가장 많이 했던 후회가 있는데…. 나는 왜 좀 더 뻔뻔하게, 영악하게 내 밥그릇을 챙기지 못했나.. 였다. 

예를 들어… 케임브리지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봤는데, 특히 박사과정 때 만난 사람들을 아주 두리뭉실하게 묶어서 보자면 대략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진짜 뭐 천재 같은데 사회성은 거의 제로인, 안의 내용에 비해 포장이 너무 약한 사람, 혹은 사회성 좋고 말도 잘하는데 왠지 실제 능력이나 지식보다 포장지가 좀 더 화려한 것 같은 사람..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대할 때 난 개인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이 좀 더 심했다. 잘난 척하는 것 같아서, 정치인처럼 제대로 대답은 안 하면서 요리조리 말 돌리며 포장하는 게 괘씸하고 약아 보여서, 왠지 박쥐처럼 지 좋을 대로 포장하다가 더 좋은 조건 나타나면 냉큼 가버리는 게 믿음이 안 가서, 등등.. 마음에 안 들 이유는 많고 많았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게 어릴 때부터 듣고자란 뿌리 깊은 한국적인 사고방식이 아닐까 싶지만… (한국에서는 겸손하길 강조하거나 입이 무겁거나 진중한 사람이 되어라, 뭐 그런 걸 미덕으로 강조하는 말들이 많고, 자기 자랑하는 건 재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니까..) 

어쨌건 그런 이유들로 나는 후자의 인물처럼 보이지 않게 무던히 애썼다. 남들은 매주 있는 소식지나 세미나마다 뭐든 어떻게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난 혼자 고고한 척 한 발짝 떨어져서는, '누군가 알아주기만'을 바랐던 거다. 그렇다고 전자의 경우처럼 허술한 포장으로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천재성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그러니까 그때는 몰랐던 거다. 영국에서 내 밥그릇을 챙기려면 영국에서는 밥을 어떻게 배급하는지 알았어야 했고, 그 방식을 따랐어야 했는데… 그때의 나는 배급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보면서도 마음에 안 든다면서 줄 설 노력조차 안 했던 거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나는 둘째의 돌이 다가오면서, 재취업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리고 재취업을 위해 준비하다가 여러 번의 실패를 맛보면서, 경력단절이라는 무시무시한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장기간 투숙이라도 할 것 마냥 내 집 앞 어딘가를 어슬렁거리는 걸 느끼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아. 나는 정작 배급 줄에도 끼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내 전용 밥그릇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마치 배고픔을 모르는 척 왜 그리 고상한 척 우아 떨고 있었던가. 막상 배고파지니 이토록 후회할 것을. 나는 왜 내게 주어진 줄 설 기회 조차 마치 반찬 투정하듯 가리며 내팽개쳤던가… 


전에도 말했다시피 영국에서 제 밥그릇을 챙기려면 나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고 드러내야 한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서 내 ‘대단함(!)’을 알아주지 않는다. 즉, 예를 들어 내가 케임브리지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을 때, 그 이름을 최대한 활용해서 어떻게든 안정된 배급 줄을 획득했어야 했다. 그때 나는 먼저 드러내기보다, ‘내가 어디 대학 출신인 줄 알면 깜짝 놀라겠지?’ 하는 이벤트 하는 기분으로 있었는데.. 그때 내가 몰랐던 건, 내가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묻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고 어쩌면 상대방은 내 겉모습만 보고 이미 ‘어학연수 온/음식점에서 일하는 동양인’으로 판단 내렸을 수 있다는 것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 대부분 과소평가를 하지, 과대평가를 하진 않는다..). 즉, 내가 먼저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그럴 기회조차 오지 않는다는 것. 


영국에서 제 밥그릇 챙기는 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앉을자리를 안내해주길 기다리는 그런 게 아니다 (뭐 당신이 금줄을 몸에 감고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 정해진 배급을 받기 위해 줄 서는 것 같은 거고, 누군가는 당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 만으로 자기들과 같은 양의 밥을 받거나, 심지어 배급 줄에 서있는 것조차 못마땅해하며 불평할 수 있다. 그 와중에 당신이 줄 밖에 서있다면, 대부분의 경우 당신이 괜찮은지 말 걸기보다 투명 인간 취급하며 자기 갈 길 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거고... 


내 개인의 결론을 말하자면... 그 시간들을 보내며 다짐한 건, 기회가 다시 온다면 정말 'Shamelessly' 그리고 독하게 그 기회를 잡을 거고, 한 점의 후회도 없이 밀고 나갈 거란 거였다. 그리고 그렇게 기회를 얻어 복직한 후 솔직히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직장동료들에게 'Sometimes you are bit scary'하는 소리를 듣더라도 나는 할 말을 하고, 뒤로 빼지 않는다. 줄밖에 서있는 기분을 아니까. 


그러니 오늘도 나만의 배급 줄을 잡기 위해 달리고 있는 모든 분들, 파이팅!!! 

작가의 이전글 영어의 애매함 (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