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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Mar 08. 2020

왜 영어 이름이 없어요?

12. 왜 있어야 하죠?

대학에 있었을 때 내 수업을 듣던 영국인 학생 한 명이 휴식 시간 때 물었다.

"Why don't you have an English name?" 

그 말에 잠깐 웃음이 나와서 대답 대신 되물었다. 

"Why should I?" 

그 학생은 잠깐 당황한 듯하다가 대답했다. 

"Because I've seen other Asian people do?" (다른 동양인 사람들이 그러는 걸 봤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두 가지 이유를 댔다. 첫째로는 영어 이름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굳이 그래야 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라고.


영어 이름에 대한 첫 경험을 얘기하자면, 수능 끝나고 무작정 놀기보다 뭐라도 해보자 하는 마음에 등록했었던 영어회화 학원이었다. 강의실은 대화 위주의 수업이라 그런지 책상과 의자들이 동그랗게 벽을 맞대고 놓여 있었고, 그 중간에서 강사분이 사람들을 돌아보며 대화를 유도하거나 옆의 사람과 대화 연습할 주제를 던져 주며 수업을 하셨는데... 첫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영어 이름 만들어 오기'였다. 영어라고 해봐야 정규 교육 과정 안에서 읽고 쓰고 문법을 암기하던 수준에 그쳐있던 나라서, 마치 매뉴얼만 공부하다가 실전 훈련에 처음 도입된 것처럼 들뜨고 떨린 마음에 하루 종일 어떤 영어 이름을 만들어야 하나 그 생각만 했다. 마치 새로운 게임 캐릭터를 만드는 것처럼... 영어 이름 하면 딱 떠오르는 이름들은 좀 흔한 것 같고 내 한글 이름과 어울릴만한 뭔가 참신한 게 없을까, 하는 생각에 내 한글 이름 뜻에 맞는 영어 단어, 내 한글 이름과 비슷한 발음의 영어단어 조합 등등 정말 영어 단어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한 순간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내 한글 이름은 세 글자 모두 받침이 들어가는, 한국인들도 한번 듣고 다시 되물어오는 그런 이름이다. 결국 나는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지 못했고, 그냥 내 이름 글자 하나하나를 영어로 대체한걸 두 번째 수업 시간에 내 영어 이름이라고 소개했는데, 그러고 나서 금세 후회했다. 막상 말하고 나니 길고 부자연스럽고, 차라리 동물이나 사물, 음식 이름이 도리어 심플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거다... 

 

그리고 영어 이름에 대한 두 번째 경험은 영국에서 어학연수 때었다. 그때는 첫 번째 경험의 악몽(!)이 그대로 떠올라 시도도 하지 않고 그나마 내 성이 흔한 편이 아니니 성을 이름으로 대체해서 소개했다. 그러고 나서 보니 나만 그런 게 아녔는 듯 다른 외국인 친구들에게 "왜 한국인들 이름은 다 비슷비슷해?" 하는 웃지 못할 소릴 듣기도 했다 (Lee, Kim, Choi 등등..).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이름(given name)은 사라진 체 성(surname)만으로 불리던 시간들은 유학생 때에도 지속되었고, 그 시간들 동안 내 마음을 바뀌게 한 계기들을 말하자면...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 갈수록 '내가 왜?'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그동안 몇몇 영국 친구들이 불러오던 내 이름이 사실은 성이란 걸 알고 난 뒤 내게 사과해왔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영국에서는 예전에 귀족들이 하인을 부를 때 성으로 불렀었고, 그걸 알게 되자 더 이상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그동안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자면... 솔직히 굳이 '영어 이름'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나 싶고, 한 발짝 더 나가서는 영어 우월주의에 가까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영어 회화를 가르치는 곳에서는 '마치 내가 영어를 쓰는 원어민이 된 것 같은 체험을 해보자' 하는 취지도 다분히 있었겠지만, 솔직히 내가 본 영어학원이나 어학원의 경우 외국인인 강사가 한국 이름을 발음하거나 외우기 힘들어서 그랬던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학연수 때 만났던 중국인 친구의 경우 호스트 맘이었던 영국인 할머니가 첫 만남에서 그녀 이름을 듣고 발음하기 어렵다며, "can I call you Kitty?" 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키티가 되어버린 것처럼…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한글 이름에 받침이 있거나 복잡한 모음이 있어 영어식으로 변환이 어려운 이름을 가진 다수의 한국인들은 각종 동물, 과일, 사물의 이름으로 대체되거나, 이름의 앞 글자 영어 철자만 따와서 DJ처럼 약자가 이름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런 반면, 어학연수 때 듣기만 해도, 아니 적힌 걸 봐도, '와, 외우기도 발음하기도 어렵네' 하고 생각했던 이름을 가진 여럿 유럽인 학생들이나 러시아, 중앙아시아 쪽 학생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들이 따로 영어 이름을 만드는 건 보니 못했다. 물론 그들 중에도 영어권에서 Christopher를 Chris라고 줄여 말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간단한 버전으로 자길 소개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적어도 자신의 본명과 상관없는 이름을 새로 만드는 건 거의 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독 받침이 있거나 모음 체계가 복잡하거나 성조가 있는 한국인, 중국인, 태국인들 같은 경우는 영어 이름을 따로 만드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비슷한 이유로 모음이 별로 없는 일본인들 같은 경우는 자기 이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경우를 많이 보다 보니 그런 생각이 슬금슬금 드는 거다. 알파벳을 기본으로 하는 영어 체계에서 많이 벗어나서 영어로 쓰기도 읽기도 어려운 언어를 가진 우리가 그들을 배려(!) 하듯 (혹은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하듯) 영어 이름을 만드는 게 마치 영어 회화의 첫걸음인 양 인식된 건 아닌가. 

그런 생각들이 한 번 두 번 쌓이기 시작하자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왜 너희들 좋으라고 내 고유의 이름까지 바꿔야 해?'



그런 이유로 유학생 생활을 마치고 취업을 한 뒤 내 한글 이름을 그대로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내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온 지 10년이 조금 넘었다. 나는 여전히 나와의 첫 만남에서 내 이름을 듣고 당황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은 두세 번째의 만남에서 조심스레 물어온다. 

"I'm so sorry, but how should I pronounce your name?" (미안한데 네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지?)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미안해하지 말라고 흔한 일이라고 말하며 한 글자 씩 다시 불러준다. 내 이름 두 글자 사이에는 하이픈도 없고 이어 쓰지도 않기 때문에 가끔 내 이름의 두 번째 글자가 마치 'middle name'인 양 착각해서 내 이름의 첫 번째 글자만 따로 떼어내 내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나 두 번째 글자를 성으로 써서 연락하는 경우도 있는데, 한번 보고 말게 아닌 이상 그것도 고쳐준다. 회의 참석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잘못 명기되어있거나 내 성을 빼고 기입한 경우에도 교정 요구를 하고..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내 한글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진다. 역시 인간은 학습의 동물! 


이런 이유들로 솔직히 (그리고 조심스레) 말하자면 나는 영어 이름을 굳이 만들어 쓰는 걸 반대한다. 상대방이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지 배려하는 것과 내 정체성의 상당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이름을 바꾸는 것 중 뭐가 더 중요할까 하는 생각 때문에. (물론 한글 이름이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외국에 나온 김에 개명의 찬스를 얻겠다, 하는 거나 내게 주어진 이름이 아니라 내가 만든 이름으로 나만의 정체성을 찾아가겠다 등등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자기한테 필요하면 결국 다 하게 되어있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그 사람과의 관계, 업무 사이에서 필요하게 되면 (혹은 중요하게 되면) 상대방은 내 이름이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라 하더라도 결국 부르게 될 거라는 거다;; 


그리고 이건 그냥 사족인데.. 한국인이 영어권에서 흔한 이름 (given name)을 가지게 되면 성과 합쳐서 전체적으로 흔한 이름(name)이 되어버린다. 즉 영어권에서는 이름이 흔한 대신 성이 흔한 경우가 별로 없어서 성으로 사람을 구분하는데 (그래서 Mr/Mrs/Miss XXX 하고 부르는 게 공적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많이 쓰이고), 한국은 성이 흔한 대신 이름이 다양해서 그 전체 조합 (예, 김 아무개 씨)으로 사람을 구별할 때가 많은 것처럼... 그러니 두 이름 체계 중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요소들만 결합해서 이름을 만들면 이름 자체가 가지는 고유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거다. 뭐 그렇다고 그 사람의 고유함과 정체성이 흐려지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 혹시라도 그 옛날 저처럼 영어 이름을 억지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 고민 살포시 내려놓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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